2018년 5월_여는 글

민주주의인가, 자유민주주의인가?
등록 2018.05.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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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학생들이 2020년부터 배울 새 역사교과서의 집필 기준 시안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삭제되고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대신 포함됐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걱정이 많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하지 않은 걱정을 홀로 십자가를 진 듯 열변을 토해낸다. 그러면서 “정권의 입맛에 따라 달라지는 집필기준을 두고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라고 의례 하듯 논란을 만들어낼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바로 헌법학자라는 고려대 장영수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서술이 빠지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삭제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심각한 문제” 라면서 “국민들을 오도(誤導)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황교안이 페이스북에 쓴 글도 기사화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사라지면) 사회주의혁명 세력이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얘기냐”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국민들을 오도하기 위해 거짓 선동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헌법학자라는 자가 거들고 있는 꼴이다. 황교안씨는 애교로 봐주기로 하고, 조선일보는 그러려니 하지만 학자가 저렇게 무식해도 되나? 법학이라는 게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상식을 벗어나면 곤란하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말은 진즉에 폐기되었어야 할 틀린 표현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이 말은 1947년 11월 14일 UN 총회 결의 제112호 II에 의거해 UN 감시하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한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수립된 정부를 지칭한다.

당시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를 묵살하고 미국의 거수기에 불과했던 UN을 앞세워 이남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감시단을 파견했지만 북측과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당연한 결정이다.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에 자주적인 민주정부가 수립되도록 돕기로 한 합의를 했던 터였다. UN 감시하의 5 · 10 총선은 미 · 소 합의의 일방적 파기였던 것이다.(김구 등 임시정부세력이 총선을 거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 친일파가 득세하여 이승만이라는 권력의 화신이 대통령이 되는 결과를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그 후 UN은 1948년 12월 12일 UN 총회 결의 제195호 III으로서 UN의 관할 영역인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고 한 것이다. 이 표현 자체도 형용모순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파기는 결국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 후의 숱한 역사적 사실은 생략하더라도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부터 9월 9일 사이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유일의 합법정부인 적이 없다. 지금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을 하기로 한 것도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조선일보는 북한을 또 하나의 한반도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정상회담을 하는 미국에 항의하고, 장영수 교수는 백악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의 문제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유기적 결합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사상적 신념으로 한다. 자유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지만, 자유주의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었고, 부르주아는 시장의 자유를 누리며 부를 독점했다. 노동자 농민 등 인민(people)의 ‘민주화’ 투쟁으로 정치 참여의 자유는 확대되고, 시장에 대해 규제가 도입되었지만 아직 멀었다.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래로 직업 선택과 거주 · 이전의 자유가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지만 현실도 그러한가? 한강과 해운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거주할 자유는 여전히 돈 많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자유일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것이 또한 개인주의의 참 모습이기도 하다. 자유와 더불어 평등이 보장되어야 자유민주주의다. 헌법학자 장영수 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이렇게 부르주아의 자유를 앞세우는 민주주의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개념은 시대의 산물이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표기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러려면 선행적으로 개념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 부자들이 독점하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삶을 누리는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 정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출발은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개념 정의가 합의되면 인민민주주의라는 표현도 무방할 것이다. 황교안의 유아적 의식 수준으로 사회주의 혁명세력이 주장한다고 해서 사용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우리 헌법도 초안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되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남북정상회담 만찬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귀빈 여러분,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이런 북측 속담이 참 정겹습니다. 김 위원장과 나는 이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우리 민언련이 하는 언론운동은 원론적으로 바른 말을 사용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우리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핵심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신문이라는 점이다. 바른 말은 바른 표현과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인민이나 동무와 같은 정겨운 우리말을 되찾고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길동무가 좋으면 언론 바로세우기 운동의 먼 길도 가까울 것이다.
 
김동민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