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호] [영화이야기] 어느 배우 '키키 키린'
등록 2019.01.2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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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 키린 (樹木希林) 1943년 1월 15일 ~ 2018년 9월 15일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습니다. 누구든 인생 어딘가에서 꿈이나 이상을 포기할 때가 옵니다. 그렇다 해도 “아, 차가 맛있구나.” “아, 무사히 태풍이 지나갔구나.”하고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떤 현실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2018년 9월 15일 일본 배우 ‘키키 키린’이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1년 극단 [분가쿠좌]에서 연기를 시작해, 1974년 TBS 드라마 <테라우치 칸타로 일가>에서 주인공 칸타로 엄마를 연기해 인기를 얻었다. 주로 어머니, 할머니 역을 맡았던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여섯 편에 출연했다. <걸어도 걸어도, 2008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2011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년>, <바닷마을 다이어리, 2015년>, <태풍이 지나가고, 2016년>, <어느 가족, 2018년>

 

그는 예순여섯 살에 고레에다 감독을 만나 따뜻하고 개성 넘치는 페르소나로 열연했다. “<태풍이 지나 가고>는 전혀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누구 옆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 어머니가 내 역할입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게 정말 어렵지요. 아무것도 없는 일상만으로 관객 마음을 붙드는 건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아주 잘 관찰하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일상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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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2008년 일본,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 키키 키린·아베 히로시·나츠 카와 유이·유히라다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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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10년 전 여름 준페이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익사했다. 10년 후 준페이 남동생 료타(아베 히로시)와 여동생 지나미는 준페이 기일에 맞춰 고향집을 방문했다. 그해 여름 목숨을 구했던 요시오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료타는 어머니 토시코(키키 키린)에게 물었다. “이제 그만 요시오를 놓아줘도 되지 않아요?” 한없이 온화했던 토시코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 아이한테 일 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 않아.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할 거야.” 사랑하는 큰아들 준페이가 세상을 떠난 후 속내를 감추고 살았던 토시코가 진심을 쏟아냈다.

 

 죽은 자식을 향한 애달픈 모정과 살아남은 요시오를 원망하는 서글픈 현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나았을까. 시선을 흩트린 채 나비를 쫓으며 죽은 준페이가 돌아왔다고 넋두리하는 토시코가 안쓰럽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모르겠다. 준페이가 품에서 사라진 후 가족 관계도 매끄럽지 않다. 당연히 가족이니까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심리적 거리감은 타인을 대할 때보다 훨씬 크다. 어쩌면 속내를 죄다 드러내 아픔은 위로하고 기쁨은 나눌 필요 없는 게 가족일지도. 투명한 보호막에서 각자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게 현명할지 모른다.

 

 토시코 애창곡은 1968년 일본 가수 이시다 야유미가 발표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다. 둘째 아들 료타가 아기였을 때 바람난 남편을 찾으러 나선 토시코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차마 아는 체 못 하고 귀가하던 길 레코드 가게에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실은 엘피판을 샀다. 담담하게 부르는 토시코, 키키 키린 눈빛이 쓸쓸하다.

 

 歩いても歩いても 小舟のように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 私はゆれて ゆれてあなたの胸の中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서 당신 품 안에서 / 足音だけが ついて来るのよ 발자국 소리만 따라오네요

 

 영화 제목 <걸어도 걸어도>는 바로 이 노랫말에서 따왔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너, 당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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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2018년 일본,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 릴리 프랭키·안도 사쿠라·키키 키린· 마츠오카 마유·죠 카이리·사사키 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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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라 좋은 점? 서로 기대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사무(릴리 프랭키), 노부요(안도 사쿠라), 아키(마츠오카 마유), 쇼타(죠 카이리), 유리(사사키 미유)는 하츠에(키키 키린) 할머니 집에서 함께 사는 가!족!이다. 어떤 혈연도 아니지만 오사무 말마따나 ‘우리는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 가족이 맞다. 누가 그러지 않았나 가족 의미는 공간과 유대가 규정한다고.

 

 이들은 하츠에 할머니 연금과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쳐 그날그날 생활하며 사회 가장자리를 맴돈다. 웃음이 넘치고 각박한 삶에 찌들지 않고, 밤하늘 불꽃놀이를 상상하며 어느 가족 이상 끈끈함을 유지한다. 감독은 2016년 실제 벌어진 «노령 연금 사기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부모가 사망했는데도 살아 있는 것으로 위장해 노령 연금을 부정으로 받은 자식 부부와 손주 가족. 이들은 부정이 밝혀지자 “부모님이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세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강력한 유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착안했다.

 

 만비끼가족(원제 万引き家族 좀도둑 가족)이 일군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연히 길에서 데려온 유리 존재가 알려지며 가족은 산산이 조각났다. 감옥에 간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조사실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은 가슴이 미어진다. 두고두고 남을 명장면이다.

 

“그 아이들(쇼타, 유리)은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머리를 몇 번이나 쓸어 넘기다 고개를 든 노부요 뺨에 차가운 눈물이 흐른다.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고 외롭게 지내다 새 가족을 만난 하츠에 할머니를 연기한 키키 키린.

온 가족이 바닷가에 놀러 간 날 홀로 모래사장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다들 고마웠어.” 이 대사는 애드리브였는데,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알아채지 못했다. 편집 작업에서 영화 후반부에 하츠에가 등장하도록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키키 키린은 영화 주제를 포착해 연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놓는다.”라고 그를 존경했다. <어느 가족>은 키키 키린 유작이다.

 

김현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