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5월호] [회원인터뷰]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정동익 회원)
등록 2018.05.3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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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련에는 이름 뒤에 의장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니는 분들이 있다. 정동익 의장님도 그중 한 분이다. 민언련이 언협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언협 의장을 지냈고, 지금은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으로 활동 중인 현역 의장이기도 하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후 민언련을 넘어 민통련에서 진보연대까지 언론, 민족, 통일 운동 현장에서 늘 현역으로 살아온 ‘정동익 의장님’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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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분기점이 된 ‘자유언론 실천선언’
 
김경실 :  1974년에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신 이후로 언협을 비롯해 여러 운동 단체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오셨는데, 민언련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아마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아닐까 싶은 동아일보 해직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정동익: 그 사건이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된 건 맞아요. 우리 집사람에게도 그렇고.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실업자 부인이 됐으니까요. 그 당시는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면 알아주던 시절이라 시집을 괜찮게 간다고 했는데, 오자마자 실업자 부인이 됐으니 기가 막혔겠지요.
 
김경실 : 정말 그러셨겠어요(웃음). 동아일보 기자는 특별한 생각이 있으셔서 선택하신 건가요?
 
정동익 : 난 원래 기자에 뜻이 있었어요. 아버님이 전북에서 편집국장, 주필 다 하셨던 전북 언론계의 최고 원로셨어요. 대쪽 같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강직하신 분이셨고 존경을 많이 받으신 분이셨는데, 아버님 영향으로 기자에 뜻을 두게 되었어요.
 
김경실 : 나이 서른둘에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실 때에 앞으로 미래가 어두울 수도 있겠다 이런 판단은 안 하셨나요? 정연주 전 KBS 사장은 한 책에서, 선언 전날 두려움이 앞서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선배들이 선언을 안 하기로 했다고 해주기를 바랐다고 고백하기도 했거든요.
 
정동익 : 주변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이 있고 행동을 같이 하는 동료들이 있으면 두려움 같은 게 안 들어요. 그냥 든든한 거지. 함께 가는 동지들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혼자 떨어져 있을 때는 자기 자신도 돌아보고 미래도 걱정이 되고 했겠지만 투쟁하는 당시에는 전혀 두려움 같은 건 없었어요.
 
김경실 : 당시에는 어떤 부서에 계셨나요?
 
정동익 : 여러 부서를 돌았어요. 방송뉴스부에서도 있었고 경찰서 출입기자도 했는데, 쫓겨날 당시에는 편집부에 있었어요. 편집부는 언론사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모든 기사가 편집부로 넘어오고 편집부에서 기사를 판단하고 크기도 정하고 하니까. 구속 학생 부모들이나 인혁당 가족분들도 신문사에 오면 으레 편집국장 책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호소도 하고 그랬는데, 중앙정보부 직원은 매일 웃으면서 들어와서 데스크에 이 기사 넣어라 빼라 압력을 넣는 걸 보면서 기자 생활을 하자니 나는 늘 울분에 차 있었어요. 자유언론 수호하겠다는 10.24 선언은 언론인으로서 당연한 거였어요.
 
자기역할 못하는 이런 언론인 생활 더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딪혀보자. 싸우자. 그랬던 거예요. ‘정보부 출입 금지’라고 그 편집국 문 앞에 써 붙여 놓고 못 들어오게 하고 우리가 매일 기사를 점검하고 어떤 압력으로 무슨 기사 빠졌다고 저녁에 보고대회를 하고 그랬어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거죠. 동아일보 보는 재미로 국민들이 산다고 할 정도였어요. 인혁당 사람들이 정보부에서 고문 받고 그런 것도 김지하가 폭로하고 그랬거든요. 우리 선언이 없었으면 그런 기사가 나갈 수도 없었어요.
 
김경실 : 원래 불의한 일을 못 참는다든가. 어떤 일에 앞장선다든가 하는 편이셨어요?
 
정동익 : 앞장서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강직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10.24 선언하고 나서 11월 12일에 천주교에서 하는 인권기도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걸 톱기사로 다뤄줄 것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편집국에서 기자 총회가 열렸어요.
 
그때 내가 긴급동의를 했어요. 이 기사는 반드시 지면에 반영돼야 하고, 반영 못 시킨다면 이런 신문은 우리가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다. 제작을 거부해야 한다. 그런 선동 연설을 내가 했어요(웃음). 그날 최초로 신문이 하루 결간돼버렸죠. 동아일보 한 호가 빠져요.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최초 결간의 주범 중 하나였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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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되고, 재판받고, 농성하고, 시위하는 출판언론인
 
김경실 : 해직되시고는 출판 일을 하셨어요.
 
정동익 : 당시는 모든 언론이 군홧발 아래서 언론이기를 포기한 때라서, 유일하게 출판이 언론 역할을 대행했던 때예요. 또 배운 게 원고를 만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접근도 쉬웠어요. ‘아침’이라는 출판사를 했는데 혼자서 하는 1인 출판사였어요.
 
김경실 :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네요. 1인 출판사는 요즘 트렌드입니다(웃음).
 
정동익 : 제일 먼저 낸 책이 『민중과 자유언론』이라고 송건호 선생님이랑 해직 동료들 10명이 모여서 언론탄압 실상을 폭로하는 책이었어요.
 
김경실 : 그 출판사에서 『김형욱 회고록을 내셨네요.
 
정동익 : 그 책 때문에 내가 고생을 좀 했어요. 『김형욱 회고록』은 미국에서 출판됐는데, 김형욱 씨가 이 책 때문에 파리에서 우리나라 정보국에게 잡혀죽었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문제가 된 책이에요. 김형욱 씨가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박정희 당시의 비밀들을 폭로한 것이기 때문에 민감한 내용이 많았어요.
 
그 책을 내가 비밀리에 입수를 했는데 그걸 중앙정보부에서 안 거예요.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고등학교 동기가 찾아왔어요. ‘우리 회사하고 부딪혀서 뒤끝이 좋은 사람 없다. 부딪히지 마라.’ 그러더라구요. 경고를 한 거죠. 그 정도하면 대개 그 선에서 막아지던 시절이었거든.
 
나도 한 달을 고민했는데 결국 ‘에이, 만들자’고 결심을 했지. 출판이란 게 비밀리에 진행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인쇄소, 종이집, 제본소를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 군데만 들통이 나도 안 되거든요. 친구한테 500만 원을 빌려서 거래처에 전부 현찰로 선금을 줬어요. 전화 하지 말라고. 돈 안 주면 돈 때문에 전화 올 수가 있거든. 그리고 추석 사흘 전에 책을 찍어서 전국 서점에 뿌리고 잠적을 했어요. 그러니 정보부가 발칵 뒤집혔지. 사전에 미리 경고도 했는데 말을 안 들었으니까 괘씸죄가 붙어서 체포 전담반이 6명이 꾸려졌더라고요. 길거리에 현상수배 전단이 붙고.
 
김경실 : 하루아침에 현상수배범이 되셨으니, 각오는 하셨겠지만 피해 다니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정동익 : 8개월 간 도망을 다니다가 인천에서 5.3 사태가 나고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면서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길래, 내가 마포 서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어요. “내가 정동익인데 이제 그만 나갈란다.”하고. 그리고 내 발로 서장실이 있는 3층까지 가는데 아무도 아는 체 하는 놈이 없어요(웃음). 그러고는 바로 유치장으로 갔어요.
 
자기들끼리 나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가장 나을지 이야기를 했겠지. 괜히 재판에 붙이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시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또 책도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이슈에서 벗어났고, 그래서였는지 나를 경범죄로 넘겼어요.
 
서울 시내 경찰서에서 경범죄 위반한 사람들 모아서 판사가 약식으로 재판을 해요. 한 200여 명을 너 1주일, 너 10일 이런 식으로 판결해서 내보내고 나만 맨 나중까지 남겨놓더니, 내가 정식 재판을 청구하겠다고 하니까 판사가 ‘관례니깐 이해를 좀 해주세요.’ 하더니 구류 10일을 때리더라고요. 그래서 마포경찰서 지하에서 10일 살고 나왔어요.
 
김경실 :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 날 약식재판으로 구류 10일. 현상수배자였는데 싱겁게 끝났네요.
 
정동익 : 그런데 정말로 고생한 건 이기형 선생의 시집 『지리산』을 내고 나서였어요. 지리산에서 벌인 투쟁을 연작시로 쓴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잡아갈 정도의 내용도 아닌데 잡혀가서 이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니까 불구속 재판하고 나는 구속 재판해서 1년 6개월에 3년 집행유예 받았어요.
 
그 당시 사회과학 출판들이 탄압을 엄청 받았어요. 걸핏하면 붙잡아가고 책을 압수해가고. 그래서 책 때문에 구속된 사람이 연 인원 백여 명이 넘어요. 단일 업종 중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자들이 나온 거지. 그 당시에 해직기자들, 해직교수들, 학생들까지 운동권들이 출판계로 대거 들어와 있었어요. 달리 먹고 살 재주들이 없으니까 출판사 와서 교정이라도 보고 연명하던 때예요. 그러니깐 걸핏하면 잡아가고 책을 뺏어가고 수백 종이 판금되고 그랬어요.
 
그래서 출판계 동료들을 규합해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란 것을 만들어 동료들 잡아가면 농성하고 성명서 내고 시위하고, 그게 또 일이었어요. 내가 초대 회장이어서 87년 6월항쟁 때 언론출판계 대표로 내가 공동대표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김경실 : 출판인이 책상 위가 아니라 거리에서 투쟁하느라 편할 날이 없었겠어요.
 
정동익 : 거의 길바닥에서 살았어요. 시위가 끝나면 전경들이 시위자들을 닭장차로 마구 끌고 가는데 한번은 한 여고생이 잡혀가면서 막 비명을 지르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린 학생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고 항의를 하니까 ‘뭐야,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니깐 데모가 이렇게 커지는 거야’ 하면서 나를 잡아다가 닭장차 안에 넣고 무조건 발로 밟는 거야. 그래서 엄청 얻어맞았어요.
 
이게 기자 눈에 띄었는지 어느 신문에 조그만 1단짜리 기사로 출판인 C모 씨가 학생 연행에 항의했다가 들어가 맞았다는 게 조그맣게 한 줄로 났어. 이름도 안 나고 C모씨로. 친구들은 이름이 없어도 니가 그런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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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9일 열린 제2기 언론학교 입학식에서 인사를 하는 정동익 의장. 언론학교는 민언련이 시민언론운동단체로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말』지의 독립과 ‘언론학교’의 탄생
 
김경실 : 한겨레신문 창간할 때 해직언론인 중 많은 분들이 합류를 하셨잖아요. 의장님은 왜 그쪽에 가지 않으셨나요?
 
정동익 : 나는 출판사를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합류를 하는데 나까지 갈 필요가 있나 생각했어요. 또 언협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어요. 『말』지를 만들던 주력 부대가 거의 한겨레신문으로 가는 바람에 기자들 몇 명만 남아 있어요. 그때 송건호 선생님이 나한테 뒷일을 부탁했어요. 언협을 맡아 달라고. 그래서 88년에 내가 언협 의장직을 맡고 조직 진용부터 새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운영위원회를 다시 조직하고. 『말』지 기자를 공채로 뽑았어요. 그때 신준영, 최진섭, 안영배, 정희상 4명이 들어왔어요. 대학신문 기자 출신들도 합류를 하고. 그러면서 언협을 다시 정상 궤도로 올리기 시작했어요.
 
김경실 : 그 이후에 『말』지가 정식 잡지로 등록을 하고 언협으로부터 독립했는데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정동익 : 『말』지는 그 전에는 무허가 잡지였어요. 그걸 89년에 정식 매체로 등록했어요. 6월항쟁 이후라 가능했어요. 원래는 언협 의장이 『말』지 사장을 겸했고, 언협에서 『말』지가 차지하는 사업 비중이 아주 컸어요. 하지만 언협이 커지고 『말』지는 『말』지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언협과 『말』지를 분리해서 각 영역을 보다 전문적으로 키워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아투위 동료였던 심재택 씨를 삼고초려해서 사장으로 영입을 하고 『말』지 운영을 부탁했어요.
 
김경실 : 『말』지를 언협에서 분리할 때 반대는 없었나요? 언협 회원들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요.
 
정동익 :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나는 해직언론인 중심으로 하는 언론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 해직언론인들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각자 일에 바쁘기도 하니 이제 언론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는 시민언론운동이란 말이 없었을 때예요. 국민언론운동이란 말을 내가 만들었어요. 90년에 언협 기관지인 <민주언론운동>을 출간할 때도 ‘국민언론운동이 필요하다’고 쓴 기억이 나요. 이제 국민들이 직접 언론의 주인으로서 언론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해직언론인들만 가지고는 역량에 한계가 있고 발전성이 없다고요. 그러자면 언협은 언론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말』지는 언론매체로서 독립적으로 운영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국민들이 언론에 대해서 전문성이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시민들을 언협의 주체로 세우는 건 맞지 않는다, 해직언론인들이 계속 해야 한다. 그런 의견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분들을 설득해서 『말』지를 독립시키고 93년 언협 총회 때 실행위원 11명 중에서 6명을 해직언론인이 아닌 『말』지 출신들, 일반 학자들 등 시민 쪽에 6명을 배려를 하고 해직언론인은 5명을 실행위원으로 해서 진용을 바꿔나갔어요.
 
김경실 : 언협이 해직기자 중심의 운동에서 언론인이 아닌 시민들도 언론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문을 넓힌 거네요.
 
정동익 : 일단 문을 열어놓긴 했는데, 시민들이 언협에 들어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91년에 시작한 언론학교였어요.
 
김경실 : 그럼 언론학교를 처음 기획하신 분도 의장님이셨어요?
 
정동익 : 언론학교 아이디어는 간사(활동가)들이 내놓은 거예요.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했어요. 그 이유가 있었어요. 91년은 강경대 사건이 나고 청년 학생들이 분신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이 최고조에 오르던 때라서 서울 시내에 시위가 없을 때가 없었어요. 수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서 지금의 촛불항쟁 비슷한 분위기까지 됐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하고 참여하던 시민들 싹 사라지는 거예요.
 
가만히 분석을 해보니 그때 정원식 총리 서리 겸 교육부장관이 외대에 들어갔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 받는 사건이 났어요. 그러자 신문마다 그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고 시간마다 TV에서 하얗게 분칠한 정원식 총리 얼굴을 내보내면서, 학생들을 스승도 몰라본 패륜아로 막 몰아갔어요. 언론에서 그렇게 며칠을 밀가루 뒤집어쓴 총리 얼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공격을 해대니까 그 뜨겁던 시위 열기가 확 식어버린 거였어요. 그 현상을 보면서 언론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민주화운동도 통일운동도 있을 수가 없겠다, 언론을 바로 세우려면 시민들이 언론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진짜 뼛속 깊이 했어요. 그래서 언론학교에 적극적으로 매달렸어요.
 
김경실 : 당시 언론학교는 정말 언협의 주축이 되는 활동이었고 아주 훌륭한 회원영입 창구였었죠.
 

선감연 기자회견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명숙, 언협 의장 정동익).jpg

민언련은 1992년 3월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시민 주도 선거보도 감시활동을 시작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동익 의장.
 
언론운동을 시민운동으로 성장시킨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정동익 : 그랬어요. 내가 언론학교 초대 교장 맡아 전국에 시국 강연회를 다니면서 국민언론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어요. 국민들이 언론으로부터 깨어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언론학교를 만들어서 그걸 중심으로 언론 운동조직을 만들라고 가는 데마다 호소했어요.
 
그러면서 지방에서 언론학교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90년도 초에 광주, 부산, 전주 이런 순서로. 언론학교가 생기고 그걸 기반으로 지역 언협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점차 시민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어요. 또 우리 간사들이 진짜 열심히 했어요. 주로 뒷풀이를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했어요. 매번 강의 끝나면 뒤풀이 분반활동에 간사들이 들어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회원 가입을 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 기세를 타고 점점 시민 회원이 늘었어요.

언협이 시민언론운동 단체로 커지게 된 큰 계기는 92년에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를 하면서였어요. 선거보도가 공정하지 못하면 대통령 선거 하나마나다. 그러니 선거 보도 감시는 이제 우리가 한다고 나선 거예요. 언협을 필두로 기독교 NCC 대표 김상근 목사, 여성민우회 한명숙 회장, 한국사회언론연구회 회장 이호성 교수 등이 발족하고 중앙언론연구회 연구자들까지 합세해서 60여 명이 석 달 간을 진짜 열심히 했어요.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언론 모니터하고 토론하고 자료집 만들고 신문 만들고 해서 서울역, 버스 터미널, 거리에서 배포했어요. 총 5회에 걸쳐서 120만 부를 전국에 뿌렸어요. 그때 참여한 사람이 김언경 처장이에요. 그 당시에 배가 부른 임신부였는데도 열심히 활동을 해서 특히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렇게 선감연 활동이 계기가 되어서 완전히 시민언론운동이 자리를 잡은 거예요. 선거보도감시연대 활동을 하면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고 그 인력들이 언협을 주도하면서 시민언론운동으로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단체 이름에도 당당하게 시민이 들어가고 사단법인이 되고. 물론 그건 내가 의장직을 그만둔 이후이긴 하지만.
 
김경실 : 그렇게 탄탄하게 시민언론운동의 바탕을 다지면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민언련 활동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민언련이 2년 전에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회원들이 늘면서 선거기간 동안 활동영역도 많이 확장시키고 전문성도 강화했어야 했습니다. 언론 관련 일이 돈이 있다고 시장에서 물건 사서 나눠주듯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를 돌려서 한꺼번에 물건 뽑아내듯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단시간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건, 오랜 세월 동안 다져놓은 토대가 튼튼했고 내공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넓게 확장을 해도 무너지지 않고 이를 계기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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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열린 총선 심판대상 정치인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동익 의장.
정동익 의장은 언론운동에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와 통일운동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쳐왔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보다 어려운 싸움

정동익 :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언론인들과 언론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한 발 더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2006년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식 날, 동아투위가 기념식을 주관하면서 제가 위원장으로서 제2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필요하다 고 했어요.
 
제1선언은 권력의 통제, 압제에 대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면 지금은 자본으로부터 자유언론실천이 필요하다, 이제 권력이 통제하던 시대는 지났고 자본이 인사권과 편집권을 손에 쥐고 완전히 언론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기득권자, 수구세력의 대변자로 만들고 있으니 자본으로부터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진짜 필요하다고 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제일 중요한 인사권 편집권을 완전히 사주가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언론자유가 신장된다고 하면 그자들의 언론자유가 신장된 거지 일반 언론 종사자들이나 시민들의 언론자유가 신장된 건 아니라고 난 보거든요. 그러니까 언론 종사자들이 사주, 광고주로 대변되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해야 해요. 권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언론이 바로 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어요.
 
권력하고 싸우는 건 어느 정도 용기만 있으면 가능한데 자본, 특히 사주, 광고주와 싸우는 건 더 어려운 싸움이다. 인사권 편집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선 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고 시민들의 더 많은 격려와 따가운 질책이 필요합니다.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줘야만 됩니다. 기자가 소명의식, 사명감, 언론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이 없으면 배부른 봉급쟁이로 소시민적인 생활에 만족하게 돼요. 그러면 언론에 희망이 없는 거예요. 지금이 다시 한번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할 때의 그런 정신이 언론계에 퍼져야 될 때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경실 :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늘 이야기하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기자는 물론이고 언론사의 존립이 걸린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각 시대별로 사명의식을 갖고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려고 하는 분들은 늘 계신 것 같아요. 그분들이 언론계를 꿋꿋이 지켜오고 있기도 하고요.
 
정동익 :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편집권 편성권을 독립시키는 건 제도적으로 만들어놔야 해요. 종편까지 신문사가 경영하면서 완전 쓰레기 언론을 만들었잖아요. 2009년에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이렇게 됐는데 이런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거예요. 언론사에 대해서 소유 지분을 일정 정도 제약하는 법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이제는 언론운동이 제도화, 법제화하는 그런 데도 나서야 합니다. 언론 민주화를 위해 어떤 법이 꼭 필요할 때는 언론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국회 앞에서 시위도 하고 국회의원실도 찾아가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관철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언련 회원들이 그런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점차 언론 운동가로서 단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김경실 :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면 이 일은 꼭 한번 해 보고 싶다 이런 건 없으세요?
 
정동익 : 동아일보 사장이 돼서 동아일보를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신문으로 만들고 싶어요. 시위 때 동아일보사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 ‘기레기’라고 소리치는 걸 보면 참 속이 시원하면서도 가슴이 씁쓸해요. 옛날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던 회사인데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게 기분 좋을 수 없는 거지요. 동아투위 동지들과 함께 동아일보를 운영한다면 그때의 10.24 정신으로 돌아가서 금방 전국에서 최고 사랑받는 국민의 신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김경실 : 그럼 만약 지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으세요? 똑같은 선택을 하셨을까요. 그때의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정동익 :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나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또 그렇게 했을 것 같아요. 똑같은 선택을. 떳떳하게 살자. 소신껏 살자.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거든요.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양심을 속이고 고개 숙여가면서 구질구질하게 오래 연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을 항상 해요.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또 그 길을 걷지 않을까 싶어요.
 
김경실 미디어위원 · 사진 김규명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