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영화이야기] 소수만 찾는 <소수의견>, 왜?
등록 2015.09.0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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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만 찾는 <소수의견>, 왜?

 

김동민(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나는 <소수의견> 같은 영화는 정의감과 의무감으로 본다. <두개의 문>이나 <지슬>, <레드 툼> 등도 그런 영화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 아는 얘기로 <소수의견>은 우여곡절 끝에 개봉되었지만 메이저 배급사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그야말로 소수의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개봉 첫 주 <연평해전>이 1,013개의 상영관을 확보한 반면 <소수의견>은 389개의 상영관에 그쳤고, 둘째 주에 <소수의견>은 194개로 대폭 줄었다. 상영관 수가 절대적으로 적을 뿐만 아니라 상영회수도 하루 3~4회에서 1회로 줄었다가 사라졌다.   
보도에 따르면, 이게 모두 메이저 배급사의 선택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당연할 것이다. 여기서 전문가는 그 원인을 분석해주어야 한다. 영화란 아무리 단순한 오락물이라도 이데올로기 혹은 ‘의견’을 내포하고 있는데, 본질을 꿰뚫고 있지 않는 한 이런 성격의 영화는 어지간해서는 ‘소수의견’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화비평뿐 아니라 비평이란 비평은 모두 주관적 사견의 발로다. 가장 웃기는 게 ‘아니면 말고’ 식의 시사비평이라는 분야다. 공인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개중 정치학을 전공한 평론가도 있어서 전문적일 것 같지만 정치학이란 게 워낙 정치적이어서 평론(가)도 그만큼 정치적이니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무릇 비평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관객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기는 소박한 수준의 소감이어서는 안 된다.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중문화 비평이라는 게 과학적이지 않다.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주의를 지향하며 글재주나 뽐내는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비평이 가장 심각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소수의 그룹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괜찮은 경제학자 베블린이 제기한 베블린 효과라는 게 있다. 수요공급의 법칙과는 반대로 상품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것이다. 현대경제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요공급의 법칙 자체가 엉터리인데다 베블린 효과라는 것도 일부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시사점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새누리당 따위의 부자정당을 지지한다든지, 노동자들이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현상도 그런 것이다. 관객들은 왜 <소수의견>을 외면하고 <연평해전>에 몰릴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와 어울리기보다는 밴드 웨건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과학자들은 밴드 웨건 효과를 편승이니 들쥐떼 근성이니 하는데 이건 인간의 본성이요 자연의 법칙이다.


<날자꾸나 민언련> 4월호에 소개된 『전방위 글쓰기』를 보니, 글쓰기의 기본으로 철학적 사고와 경제에 대한 이해,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글쓰기의 ‘필수 교양’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할 필요가 있는데, 자연과학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이다. 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자연과학은 영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큰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앞자리를 비워두고 뒷자리에 몰려있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대중집회도 보면 앞자리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명망가들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은 앞에 앉지 않는다. 연예인들 공연은 그 반대다. 규모가 큰 집회를 마치고 거리행진이라도 하면 리드하는 사람이 없어도 흐름이 형성된다. 이렇게 우연히 군집이 형성되면 개인들은 그곳에 합류한다. 우연한 현상으로 보이지만 패턴이 있는 것이다.


<소수의견>이 작품성은 뛰어난데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해 관객이 늘지 않는다는 점을 평자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영화도 무거운 질량감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의견>에는 <변호인>의 송강호처럼 대중들을 흡인하는 중량감 있는 배우나 밴드 웨건처럼 짜릿하게 전기가 통해서 끌리게 하게 하는 배우가 없다. 있어도 약하다. 그러니 <연평해전>을 제칠 수 있는 패턴이 선행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소수의견에 동조하고 함께 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법원 판결에서도 소수의견은 소수의견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판결내용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다수의견에 따른다.
그런 점에서 <소수의견>의 문제는 제목에 있었다고 본다. 소수의견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에 김의성이 윤계상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은 국가를 위해 희생했고, 나는 봉사했다. 그런데 넌 뭘 했냐?” <연평해전>도 그렇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 100원짜리 소송도 했으니 제목을 <국가란 무엇인가>로 했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