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영화이야기] 두 발로 서서 세상에 맞서는 용기<벌새>
등록 2019.11.0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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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28관왕을 달성하며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으며 한국 독립영화계의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 <벌새>. 감독 박찬욱, 린 램지, 제인 캠피온의 극찬과 앨리슨 베델 등 최고의 감독, 작가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한국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으로 12만 명을 돌파, 명실상부 올해의 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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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4살 여중생 주인공 ‘은희’가 마주한 1994년의 한국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994년 강남의 대치동. 중산층의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모범생인 오빠와 사고뭉치인 언니를 둔 막내 은희는 특별하지도 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중학교 2학년생이다. 입시교육 중심인 학교생활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언제나 외톨이지만 방과 후 아슬아슬한 일탈을 함께 할 단짝 친구가 있고 가끔씩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는 남자 친구도 있다. 큰 꿈은 없지만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정당하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아이다. 하지만 세상은 은희가 보기엔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학교는 대학과 입시로 점철되어 있고 가족들의 소통은 언제나 일방통행이며 일상의 폭력이 당연시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문 학원에서 새로 온 ‘ 영지’ 선생님과 만나게 된다. 이제껏 보지 못한 어른의 모습이다.

한문 선생님 ‘영지’는 세상이 이해되지 않고, 궁금한 것들로 투성이인 ‘은희’에게 유일한 어른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설프게 동정하지 않고,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며 ‘은희’에게 ‘영지’선생님은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성수 대교가 무너진다. 그리고 ‘영지’ 선생님과의 연락이 끊어진다.

 

영화는 지극히 보편적인 개인사를 이야기를 하는 거 같지만 개인의 이야기가 확장되어 가족, 사회와 맞물려 한국 사회의 거대한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1994년은 긴 군부독재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가 된 일 년 뒤의 이야기이다. 강남 대치동 소위 신흥 ‘부자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모는 떡집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안정된 부유층에 입성을 꿈꾸고 유일한 희망인 아들을 서울대 입학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고도 경제 성장의 시대, 사람보다 물질이 우선인 사회에서 이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필사적으로 달린다. 학교에선 입시경쟁을 부추겨 날라리와 모범생으로 갈라놓고 집에서도 권력의 우위는 언제나 경제력을 쥐고 있는 아버지와 공부 잘하는 오빠다. 여기서 어머니와 딸들은 배제되고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가부장제, 남녀 차별, 빈부격차, 학력 지상주의 사회의 모순들이 어린 ‘은희’의 마음에 조금씩 내상을 입힌다. 물질의 가치에 매몰되어 속은 곪아가고 있는 가족의 형태는 성수대교의 붕괴의 비극을 통해 상실의 고통으로 다시금 사회적인 문제로 환기된다.

 

 

벌새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하고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평범하고 보편적인 이 개인의 이야기에 저마다 깊숙한 곳에 숨죽이며 묻어 두었던 수많은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기억 속의 나만의 ‘은희’를 소환해 내기 시작하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제 1994년을 지나온 김보라 감독은 “우리가 지금 겪는 감정과 ‘은희’가 겪는 감정은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외양이 다를 뿐 감정의 근원은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 겪은 감정이 나이 들었다고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벌새는 과거의 이야기이자 지금 동시대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는 삶의 의지를 희망이랑 이름으로 거창하게 위로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두발로 서서 세상과 맞서보라고 조심스럽게 조언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1994년의 은희가 지금 서울 어딘가에서 당당히 그녀답게 서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화 벌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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