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호] [책이야기] 모욕과 기쁨이 교차하는 일터. 나의 존재를 지키는 두 가지 방식
등록 2019.11.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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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한겨레 출판)과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1일 8시간, 1주 40시간의 법정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법정 정년인 60세까지 일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대략 10만 시간 이상 일하면 살아간다. 우리가 월급 주는 회사에 판매하는 것은 노동력 상품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나 회사에 대한 충성처럼 회사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요구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성립한 근대 이후 자본은 임금의 대가인 노동력 상품 그 이상의 것을 동력으로 오늘의 부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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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은 수십 년간 일에 대한 열정과 회사에 대한 충성을 바치고도 구조조정 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로 부터 비참하게 버림받은 중년 노동자의 얘기다. 통신 공기업에 입사해 26년간 현장 팀에서 수리와 설치를 담당하던 주인공은 저성과자로 분류돼 재교육 직전 상사로부터 퇴사를 권유 받는다. 주인공에게 아직 부양해야 할 고등학교 자녀와 홀어머니가 있고 노후를 대비해 마련한 변두리 다세대 주택 구입의 빚도 남아 있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생계의 논리는 부차적이다.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노하우를 익히고 실력이 늘어가는 것. 주인공에게 직장과 일이란 그런 것이다. 그 대가로 그가 회사에 기대했던 것은 “존중과, 감사, 이해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회사의 사직 요청을 거절하자 돌아 온 것은 모욕이었다. 회사는 지역의 거점센터로 영업 일을 하라며 그를 쫓아냈고 26년간 통신 설비 설치와 수리를 담당한 기술자에게 인터넷 가입 영업을 지시했다. 회사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일을 뺏음으로써 모욕을 줬다.

 

『9번의 일』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은 일과 삶의 분리 없이 평생직장의 신화를 만들어온 베이비붐 세대를 떠올릴 것이다. 이들에게 일을 그만 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붕괴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주인공은 회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송전탑 건설을 대행하는 자회사에 편입되어 이름도 없이 78구역 1조 9번으로 불리며 송전탑 건설에 앞장서다가 이를 막는 마을 주민들과 갈등하다 파국을 맞는다.

 

『9번의 일』의 주인공과 달리 최근의 한국사회의 2030 세대는 회사가 평생 자신을 지켜줄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근로조건에 따른 이직이 흔하고 회사와 자신을 분리하는데 익숙하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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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속 주인공 안나는 판교테크노벨리로 대표되는 IT기업에서 웹서비스를 담당하는 지식노동자다. 회사 대표는 기술기업 특유의 수평적 조직문화를 강조하며 서로가 영어 이름을 부르자고 하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할 뿐 아침마다 직원들을 상대로 한 일방적 훈시가 보람인 젊은 꼰대다.

 

 

어느 날 안나는 사장으로부터 회사가 만든 중고거래 앱에 너무 많은 글을 올리는 유저인 ‘거북이 알’에 대한 대처를 지시받는다. 안나는 고객을 가장해 거북이 알을 만나게 되는데, 거북이 알은 유명 카드회사의 서비스 기획자였으나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월급 대신 카드사 포인트로 임금을 지급받게 된 ‘직장 갑질’ 피해자였다. 거북이 알이 안나 회사의 중고거래 앱에 그렇게 많은 상품을 올려 판매한 이유도 해당 포인트를 소진하여 현금화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회의 을이자 약자인 여성 노동자 안나와 거북이 알은 『9번의 일』의 주인공처럼 회사가 주는 굴욕과 절망에 굴하지 만은 않는다. 자신을 짓누르는 회사에서의 일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홍콩행 비행기 표를 끊어 현명하게 회피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영리하게 활용해 나름의 생존방법을 터득한다. 회사의 사직강요에도 자신의 전부인 일에 대한 묵직한 고민으로 버티는 『9번의 일』의 주인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9번의 일』이 던지는 메시지는 자신의 속한 회사와 일을 동일시해 내 주변의 관계 미치는 영향은 도외시 한 채 열심히만 해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속 주인공들처럼 일과 나를 분리하면 대안이 될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기쁨만으로 일터에서의 모욕과 인간관계의 긴장을 견딜 수 있을까? 홍콩을 넘어 유럽, 마지막엔 어디에 가야 일터에서 긁힌 마음의 상처가 치유 될까?

 

두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욕과 기쁨이 교차하는 일터에서 버티며 자존감을 지키려는 일하는 이들의 고단한 삶을 재현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 판단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고 때로는 경쾌하고 발랄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동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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