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10월호] [영화이야기] 라붐, 소피 마르소&첫사랑
등록 2020.10.0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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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쇼」 창간호 표지 모델이 누구였더라?’

 

떠오르지 않았다. 왕조현? 종초홍? 강수연?

1989년 4월 영화 월간지 「로드쇼」 창간호가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첫 번째 실력 고사를 마치자마자 서점에 가서 잡지를 샀다.

 

“지금 신도림 신도림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는 열차를 그냥 보내기로 했다.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전철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검색어를 넣었다. 로드쇼 창간호, 표지 모델, 누구였…

 

앗. 소피 마르소다. 의외였다.

 

당시 한국에선 1988년 개봉한 정소동 감독 연출의 홍콩 영화 「천녀유혼 倩女幽魂」 열풍이 여전했다. 매력 넘치는 귀신 ‘섭소천’을 연기한 왕조현 인기가 치솟았다. 발행 내내 홍콩 영화를 사랑했던 「로드쇼」였기에 창간호 표지 모델은 당연히 홍콩 배우일 거라 기대했다. 왕조현이 아니라면, 1987년 홍콩에서 개봉해 한국까지 입소문이 퍼진 「가을날의 동화 秋天的童話」 주인공 ‘제니퍼’를 연기한 종초홍은 어땠을까. 한국에서 「가을날의 동화」는 1989년 8월 여름방학에 개봉했다. 가을에 물든 뉴욕 거리를 걷는 제니퍼를 잊을 수 없다.

31년 전 이미 나온 결과물을 두고 단지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삼 기대를 하다니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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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피 마르소였을까?

그는 1980년 한국 나이 열다섯 살에 클로드 피노토 감독이 연출한 「라붐 The Party, La Boum」으로 데뷔했다. 700:1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으로 뽑힌 소피는 낭만이 가득한 도시 파리에서 첫사랑에 빠진 학생 ‘빅’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프랑스에서만 330만 명이 「라붐」을 봤고, 소피는 데뷔와 동시에 인기 정점을 찍었다. 한국에서는 당시 「라붐」 영화 판권을 확보한 배급사가 없었다. 극장이 아니라 TV나 VHS 테이프로 먼저 봐야 했다. 프랑스 개봉 후 한참 지난 1989년 5월 KBS에서 첫 방송 했다. 성우 더빙 버전이었다. 2013년에야 영화 판권을 획득하고, 10월 24일 제작 33년 만에 정식 개봉했다.

 

따져 보면 80년대 초중반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다이언 레인과 책받침 모델을 도맡은 소피 마르소 주연 「라붐 1, 2」를 당시에 실제로 극장에서 본 사람은 거의 없단 말이다.

정확히는 「라붐」을 극장에서 관람한 사람이 있다. 1984년 영화 월간지 「스크린」에서 창간 기념 이벤트로 「라붐」 시사회를 열었는데,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과 부산 시민회관에 700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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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마르소는 「라붐」으로 데뷔와 동시에 인기 정점을 찍었다 / 출처=네이버 영화

 

「라붐」 시리즈는 OST가 더 인기를 얻었다

「라붐 1」에서 리처드 샌더슨(Richard Sanderson)이 부른 <리얼리티 Reality>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친숙하고 감미롭다. 어느 파티장에서 만난 남학생 마튜(알렉산드르 스털링)가 빅(소피 마르소)에게 헤드폰을 씌어주는 장면에서 흐르는 바로 그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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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붐」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빅에게 마튜가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 / 출처=네이버 영화

 

Dreams are my reality 꿈이 현실이 된 거 같아요

A different kind of reality 다른 종류의 현실이죠

I dream of loving in the night 밤마다 나는 사랑을 꿈꿔요

And loving seems all right 그런 사랑이라면 괜찮아요

Although it's only fantasy 그것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라붐 2」 주제가는 영국 리버풀 출신 4인조 뉴웨이브 밴드 쿡 다 북스(Cook Da Books)가 불렀다. 음악감독 블라디미르 코스마가 작곡한 <유어 아이스 Your eyes>는 연말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에서 선정한 ‘올해 영화음악 베스트’ 상위권에 올랐다.

 

 

다시 돌아가, 왜 소피 마르소였을까

「로드쇼」 표지를 살폈더니 ‘HOT ISSUE 소피 마르소 변신선언’이란 문장이 있다. 문장 아래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Mes Nuits Sont Plus Belles Que Vos Jours」, 「지옥에 빠진 육체 Descente Aux Enfers」, 「유 콜 잇 러브 You Call it love」 영화 세 편이 있다.

 

첫사랑의 설렘을 로맨틱하게 그린 영화 두 편으로 전 세계 하이틴 스타로 떠오른 소피 마르소는 1985년 스무 살에 전격 변신을 시도했다. 이른바 ‘성인 영화'에 출연했다. 1985년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 영화 「격정/성난 사랑 L’Amour Braque」을 시작으로 1986년 프란시스 지로드 감독 영화 「지옥에 빠진 육체」에 출연했다. 1989년 한국 개봉 포스터 카피는 ‘쏘피마르소의 충격적 성인선언’이었다. 성인선언은 한자 成人宣言으로 썼다.

 

연인 줄랍스키 감독이 연출한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제목만으로 화제였다. 훗날 한국 남성 듀오 코나가 부른 가요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의 모티브였다. 1988년 출연한 「유 콜 잇 러브」의 원제는 「The Student」다. 극 중 소피 마르소는 대학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발렌타인 역으로 출연한다. 결말에 팝 음악 작곡가 에드워드 젠슨과 사랑에 골인한다. 캐롤라인 크루거(Karoline Kruger)가 부른 <You Call it love>는 스테디셀러에 올랐다.

 

소피 마르소는 1980년에 데뷔한 후 1989년까지 10년 동안 하이틴 영화부터 파격적인 성인 장르까지 폭넓게 스펙트럼을 펼치며 캐릭터를 구축했다. 「로드쇼」 창간호 표지 모델로 손색없다. 근사하다.

 

대부분 모르는 사실, 소피 마르소는 영화 세 편을 직접 연출했다. 2002년 연출한 「사랑한다고 말해줘 Parlez-moi D’amour」는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주연도 겸한 2007년 연출작 「트리비알 Trivial」에서 협연한 크리스토퍼 램버트(대표작 「포트리스」‧「하이랜더」시리즈)와 연인이 됐다.

 

“지금 신도림 신도림행 열차가 들어…”

 

난 열차를 몇 번이나 보낸 걸까.

문득 소피 마르소에 빠져 오래도록 플랫폼을 지켰다.

 

김현식 회원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9.10월호 PDF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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