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2021년 1월호] [책이야기] “왜 여성들뿐인가?”
등록 2021.02.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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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오드 메르미오 지음, 이민경 옮김, 롤러코스터, 2020년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낙태죄 비범죄화’와 관련한 사회적 논쟁의 다른 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낙태’를 ‘죄’로 만들려는 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단체의 대립이 쉽사리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성과 재생산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을 정의하는 용어의 선택이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보면, ‘낙태(落胎)’라는 용어 자체에 이미 특정 정치적 입장이 숨어 있다. 사전적‧의학적 정의로는 ‘자연 분만 시기 이전에 태아를 모체에서 분리하는 일. 또는 그 태아’라고 건조하게 정의되어 있다. 여기엔,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의 몸과 감정 그리고 경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여성의 경험을 논쟁의 한가운데로 가져오고 싶은 사람들은, 그래서 ‘낙태’라는 용어 대신 임신중지 또는 임신중단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이 용어는 여전히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신조어에 가깝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이 여성만의 문제일까? 임신은 여성 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다. 거기엔 ‘남성’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는 임신중지를 결심하고 이를 결행하는 과정에서 겪은 여성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러한 여성을 곁에서 도운 남성의 경험 또한 비슷한 비중으로 다룬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흔히 낙태라고 말해지는 임신중지를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다.

 

“좋아서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프랑스 보건부 장관을 지낸 여성 정치인 시몬 베유는 말했다. ‘프로-라이프(pro-life‧태아 생명 중시)’ 대 ‘프로-초이스(pro-choice‧여성의 선택권 중시)’라는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쟁을 풀어갈 틈이 없다. 태아를 생명으로 보느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 태아를 품고 있는 모체, 즉 여성의 경험이 불가피하게 삭제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선택을 강조한다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의사 마르탱 뱅클레르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왜 이 결과를 걱정하는 건 여성들뿐인가? 왜 남성들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느끼는가? 왜 파니, 코린과 같은 친구들은 사랑을 나누고 난 뒤에 일어날 수 있는 위협에 대해 알게 되고 남성 파트너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임신중지에 대해 배우면서 조금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낙태 또는 임신중지의 당사자는 여성만이 아니다. 남성 또한 당사자다. 남성으로서 내가 임신중지에 대해 알아가고 사유하고 체험하고 경청할 때, 나 또한 마르탱 뱅클레르처럼 조금은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낀다. 일부러 또는 무의식에서 그 문제로부터 도망갔던 지난날들이 있다. 함께한 행동을 함께 책임지지 않고 상대에게 무한 책임을 넘겨버리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자책과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올라온다.

 

지은이 오드 메르미오는 ‘틈 사이로 들어가고자 했다’고 한다. 책의 주제는 오드의 말처럼 ‘혼란한 장소와 모호하거나 확실한 날것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자 여성들의 주체적 힘을 돋우는 이야기’(마르탱 뱅클레르)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이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 사이의 ‘틈 사이’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었다.

 

역자 이민경은 옮긴이의 글을 통해, 번역 작업을 하며 겪은 스스로의 변화를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경험이 가장 정치적인 서사를 통해서만 발화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낙인화된 경험을 통과하는 이들을 숨게”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한다.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서사만을 강조할 경우, 대부분 정치적인 것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든 삶의 작은 목소리를 억압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우리는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궈징 지음, 우디 옮김, 원더박스, 2020)에 대한 해제에서 이렇게 썼다.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이라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는 정희진이 말한 ‘광범위한 기록’을 향한 여성 그리고 남성의 이야기다.

 

신호승 <대화의 정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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