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가을호] [여는글] 속물근성
등록 2021.11.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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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인문학적 교양으로 풀어내 ‘일상의 철학자’로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에 ‘속물근성(snobbery)’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이 말은 19세기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의 대학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작위가 없다’는 의미로 ‘sinenobilitate’라고 적는 관례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을 가리켰던 말이 세월이 흘러 거의 정반대의 의미로 ‘상대방이 높은 지위에 있지 않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했다고 한다. 권력, 부, 쾌락적 유희 등을 추구하고 지위와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우리는 ‘속물근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상대적으로 그런 권력과 지위에서 먼 사람에게는 매우 유감스럽게 자행하는 차별행위를 비난할 때 속물이라 표현한다.

 

속물근성 얘기하는 이유는?

언론 자유가 확장되면 신뢰도는 높아진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이 상식에 반한다. 자료를 보면 자유지수는 높아지고 신뢰지수는 추락하고 있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낮은 신뢰도의 원인으로 보도지침, 사전검열 등 권위주의 정권의 언론 탄압을 꼽았다. 그런데 규제와 탄압이 없어진, 어느 때보다 언론 자유를 누리고 있는 지금, 여전히 언론의 신뢰도가 꼴찌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새삼 언론의 ‘속물근성’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의 역할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고 이를 강조하는 의미로 입법, 사법, 행정에 이어 ‘제4부’라고 합니다.” 먼 옛날(?) 얘기지만 지금도 유효하다. ‘빛과 소금’의 역할과 속물근성은 양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속물근성으로 가득하다.

 

돈과 권력을 향한 언론의 속물근성

언론과 검찰의 속물근성은 함께 움직인다. 검찰이 ‘선택적 정의’라 비난받으면서도 표적 수사, 봐주기 수사를 부끄럼 없이 하는 이면에는 언론이 손발을 맞춰주는 협조가 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을 키우거나 덮거나 마음대로다. 의도적으로 검찰이 정보를 흘리고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면 여론을 핑계로 검찰이 쌍끌이 수사를 해 없던 죄도 생기고, 검찰이 적당히 덮고 언론이 눈 감으면 있던 죄도 없어지는 게 현실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개혁 의지도 이들의 화려한 콤비 플레이로 본질은 사라지고 시끄러운 잡음만 남기고 멀어졌다. 퇴임한 전 검찰총장의 정치적 입장을 굳이 취재 형식을 빌려 꾸준히 과대 포장해 주요 뉴스로 전했던 행태를 보면 권력을 향한 언론의 속물근성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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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이동재 전 채널A 기자가 감옥에 있던 전 신라젠 대주주 이철 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 출처=MBC뉴스 갈무리

 

노동인권저널리즘센터(소장 탁종렬)가 제공한 경제 관련 언론 모니터 자료를 보면 경제 뉴스에서 가장 ‘핫’한 대접 받는 곳이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원)이다. 한경원은 기업 후원으로 탄생, 운영되고 설립 목적이 자본 우위의 불공정한 자유시장경제체제의 확대 및 발전이다. 자주 각종 경제 지수를 담은 연구보고서를 발행하고 보도자료를 내지만 결론은 자유기업, 자유시장, 자유경쟁을 내세운 기업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로 일관된다. 앞뒤 안 맞는 뻔한 주장을 담은 연구보고서이지만 경제지를 중심으로 언론은 과도한 정성을 담아 기사, 사설, 칼럼 등 다양한 형태로 다룬다. 친자본 반노동 뉴스가 반복적‧주기적으로 나오는 이유이다. 공정한 사회발전에 적합하지 않아 수정을 요구받고 있는 극단적 자본 중심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언론이 앞장서 홍보한다. 자본을 향한 언론의 속물근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위와 권력에서 먼 사람을 대하는 언론의 속물근성

언론은 지위와 권력에서 먼 사람을 불쾌(불편)하게 바라보는 속물근성 역시 숨기지 않는다. 노동자,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은 언제나 싸늘하고 적대적이다. 억울한 사회적 죽임에 대해선 애써 모른 척하거나 본질을 피해 개인사로 취급하고 정당한 권리 주장엔 ‘생떼’로 몰아간다. 뉴스 속에 약자와 소수자는 없거나, 귀찮은 별종이 되거나, 그저 불쌍한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저널리즘 회복, 속물근성 버리는 것부터

속물근성이 만연한 언론은 공정치 못한 시선으로 왜곡된 선택적 정의를 말한다. 차별적 행위로 인한 저널리즘의 훼손은 신뢰에 치명적이다. 저널리즘의 상식에서 출발해 신뢰 회복을 위한 첫걸음으로 속물근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언론이 지배권력에 대한 속물근성을 못 버린다면 사회발전과 진보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강성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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