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봄+여름호] [음악이야기] 아름답게 늙어가기 - 쇼팽의 또다른 이름, 루빈슈타인
등록 2022.08.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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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폴로네즈 A♭ 장조 <영웅>(1964년 1월 모스크바 연주)

 

"행복의 비결은 삶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이든 나쁜 삶이든 말이죠."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1886〜1982)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삶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는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겼고,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맨티스트였다. 그가 연주한 쇼팽의 폴로네즈 A♭장조 '영웅' 경이로운 연주다. 끝부분, 왼손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 건반에 수직으로 내리꽂는 '공중제비 타건'은 탄성을 자아낸다. 거인의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압도한 옛 시대의 거장....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 그가 펼쳐 보이는 서정적인 패시지는 맑고 섬세하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고, 유쾌하고, 부드럽다. 그는 어떤 곡이든 음악혼의 정수를 청중의 마음에 명료하게 전달한다. 쇼팽의 폴로네즈에는 러시아의 압제에 신음하는 폴란드 민중의 정서를 담은 곡도 있고, 찬란하게 빛나는 폴란드의 꿈을 노래한 곡도 있다. '영웅' 폴로네즈는 후자에 속한다. 루빈슈타인은 이 곡을 연주회의 마지막에 즐겨 배치했다. 끝 부분의 화려한 테크닉은 자연스레 청중의 환호와 열광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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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왈츠 C#단조 OP.64-2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루빈슈타인의 조국이기도 했다. 그의 쇼팽은 '정통 폴란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적이 아니라 인간적이었고, 그만큼 폴란드 민중의 정서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루빈슈타인을 가리켜 '쇼팽의 또 다른 이름'이라 부른다. 그가 사랑한 쇼팽의 왈츠 C#단조 Op.64-2를 들어보자. 그는 청중들이 앙코르를 외치면 이 곡을 즐겨 연주했다. 그는 따뜻하고 섬세한 감수성으로 아름답게 노래한다.

 

루빈슈타인은 1886년 폴란드의 로지에서 직조업을 하는 유태인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 한 번 들은 멜로 디를 척척 연주하고 조옮김까지 해내는 신동이었다. 꼬마 루빈 슈타인은 7살 때 폴란드에서 데뷔 연주회를 한 뒤, 베를린・파리・뉴욕을 넘나드는 연주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젊은 루빈슈타인은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시가와 와인을 즐겼고, 연습도 많이 하지 않았다.

 

"저는 틀릴 위험이 있는 어려운 패시지는 살짝 고쳐서 쉽게 연주하곤 했죠. 저는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다. 빠른 패시지나 분산화음을 완벽하게 연습하려고 몇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그냥 연주 회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지요."

 

젊은 루빈슈타인에게 청중들은 열광했지만 이상하게도 비평가들은 냉담했다. 그의 테크닉이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음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루빈슈타인이 진정 위대한 거장으로 거듭난 것은 40살 무렵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의 쇼팽 연주를 들은 뒤 정신이 번쩍 들어서 연습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나를 두고 '좀 더 흘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 않을까? '내 아내와 자식에게 남길 것이 이 정도의 명예뿐이었나?’'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날부터 피아니스트로서 내 삶이 다시 시작됐고, 훗날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가 연주한 쇼팽에 비평가들은 여전히 갸우뚱하고 있었다. 파데레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낭만주의 계열의 거장들과 연주 방식이 달랐던 것. 루빈슈타인의 말. "저는 어릴 적부터 쇼팽의 음악을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지루하고 형편없는 연주뿐이었습니다. 다들 쇼팽에 대한 과장된 신화를 신봉했기 때문이죠. 쇼팽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음악가로 인식됐고, 감상적인 여자들을 위해 야상곡이나 작곡하는 낭만주의자로 여겨졌어요. 이런 어이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으니 쇼팽을 형편없이 연주할 수밖에..."

 

그의 쇼팽은 무미건조하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루빈슈타인은 음악적으로는 완벽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나는 고집스레 쇼팽을 프로그램에 넣었습니다. 비평가들 또한 지겹도록 똑같은 평을 써 댔죠. 한참 후에야 내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비로소 나는 쇼팽을 내 방식대로 청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루빈슈타인은 낭만주의의 기치를 내건 마지막 피아니스트였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의 저속한 면은 피하고 좋은 면만 모두 취한 현명한 음악가였다. 기품 있는 루바토를 구사하여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할 것, 영혼의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의 정서와 의미를 드러낼 것. 루빈슈타인의 쇼팽 해석,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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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앙드레 프레빈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루빈슈타인은 영원한 젊은이였다. 진정한 비르투오소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강인한 정신력과 음향을 보여주 는 걸까. 그는 70세, 75세, 80세, 85세를 넘기면서 생명력과 힘을 점점 더해갔다. 1894년, 7살 때 폴란드에서 데뷔한 뒤 1976년 런던 위그모어 홀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그는 80여 년 동안 세계 청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라이벌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다. 쇼팽을 제외하면 레퍼토리도 거의 겹치지 않았다. 호로비츠가 밤의 세계를 지배했다면 루빈슈타인은 언제나 태양 아래서 빛났다. 그는 호로비츠의 경이로운 테크닉을 찬탄하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했다. 그러나 루빈슈타인은 자신이 '더 나은 음악가'라고 말했다. 그는 술, 여행, 미술, 사랑 등 인생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나눈 이웃이었다.

 

루빈슈타인은 자기 영달만 추구한 양심 없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2차 대전 때는 나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입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적십자를 돕기 위해 많은 연주회를 열었다. 전쟁 후 미국에서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매진이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약했고 TV 음악회에도 자주 출연했다. 그는 돈방석에 앉았다. "제가 연주하는 작품을 쓴 작곡가들은 보잘것없는 돈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연주회와 레코딩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죠. 그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현실입니까."

 

영원한 청년이자 로맨티스트였던 루빈슈타인. 그가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2번 F단조는 쇼팽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쇼팽의 사랑과 열정, 꿈과 우수.... 80살 노대가의 연주에서 20살쇼팽의 마음이 고귀하게 빛난다.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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