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반복되는 방송 노동자의 죽음, 방송국이 자르고 법원은 떠밀었다
등록 2020.02.0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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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계가 버리지 못한 악습, 사법부가 방치한 노동권 사각지대로 인해 또 한 명의 방송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2월 4일, CJB청주방송 이재학 PD가 사측의 부당해고를 성토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민주언론시민연합은 고 이재학 PD를 벼랑 끝으로 내몬 청주방송과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내팽개친 법원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정규직PD와 다를 바 없이 일하고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간부들의 비서·운전기사 노릇까지 했다는 이재학PD를,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해고한 청주방송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재학PD는 근로자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법원 역시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일을 시킬 때는 ‘프리랜서’도 회사의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자고, 자를 땐 ‘프리랜서’라 ‘회사 소속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 죽음의 모순을 하루빨리 깨부숴야 한다. 청주방송은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는 무의미한 인사치레는 집어 치우고 당장 고 이재학PD의 명예회복을 위한 실질적 조치는 물론, 프리랜서를 포함한 모든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 대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또한 사법부는 이렇다 할 판례도 없이 노동권 사각지대로 방치된 방송계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관련 법리를 검토하고 판결의 방향성을 정립해야 한다.

 

말 한 마디에 ‘해고’? 도대체 뭘 해야 ‘방송국 노동자’란 말인가

안타까운 죽음의 발단을 만든 청주방송의 행태는 참담하다. 청주방송이 14년 간 정규직PD와 다를 바 없이 일한 고 이재학PD를 단칼에 해고한 경위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2018년 4월, 한 달에 120~160만 원에 불과한 작가 및 프리랜서PD 등 비정규직 제작진의 인건비 인상을 공식석상에서 요청했다는 이유였다. 고인에 따르면 청주방송 기획제작국 국장은 요청을 듣자마자 “그만둔다는 말로 듣겠다” 소리쳤고 며칠 만에 프로그램 하차를 통보했다고 한다.

 

고 이재학PD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만으로 말 한 마디에 해고가 가능하다면 그러한 관행과 법 체계는 당연히 뜯어고쳐야 한다. ‘프리랜서’ 고 이재학PD는 ‘정규직’이나 다름 없는 직무를 수행했다. 2004년 조연출(AD)로 청주방송에 입사하여 2010년부터 연출PD를 맡아 <TV닥터 건강클리닉>, <쇼!뮤직파워>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해고를 당한 2018년 4월 경에도 <TV여행 아름다운 충북> 등 2개 프로그램을 맡았다. 정규 프로그램 외 특집 생방송 제작에도 참여했고 방송 최종 검수, 섭외, 프로그램 구성·촬영·편집, 중계차 디렉팅 등 정규직PD 업무까지 포괄하여 수행했다. 윗선에 업무보고도 올렸으며 내근의 경우 오전 8시 30분 출근해 오후 6시 이후 퇴근, 매주 5~7일을 근무했다고 한다. 청주방송이 충북 지역 지자체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제작하는 프로그램 기안서, 공식서류에 이재학 씨가 ‘실무책임자’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동료들도 모두 고인을 ‘PD’로 불렀고 청주방송은 ‘청주방송 기획제작국PD’라 찍힌 명함까지 줬다. 청주방송 사측도, 동료들도 고인이 ‘정규직PD’와 다름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고인이 ‘근로자 지위’, 즉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할 때는 ‘말 한 마디로 해고가 가능한 일개 프리랜서’로 취급한 것이다.

 

노동 현실 반영하지 못하는 법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지난 1월 22일, 고 이재학PD가 청주방송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확인한 1심 재판부의 판결 역시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미디어오늘 <부당해고 다투던 청주방송 프리랜서 PD “억울하다목숨 끊어>(2/5)에 따르면 “청주지법 민사6단독 정선오 판사는 ‘원고(고 이재학 PD)는 오랫동안 AD로 일했고, 근무형태는 정규직과 달리 특정 시간 및 장소에 출퇴근할 의무가 없었고, 회사는 그의 근태를 관리하거나 징계 등으로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청주방송으로부터 지휘·감독을 받은 건 사실이나 부수적 업무 범위 내의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청주방송 사측 입장을 그대로 베껴쓴 수준이다. 근로기준법과 관련 대법원 판례는 근로자성을 판단할 때 급여의 지급 방식이나 형태보다는 사용자에 종속되어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를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청주방송국에서 청주방송의 프로그램을 10년 넘게 제작하고 업무보고까지 올린 고 이재학PD가 청주방송에 종속된 노동자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측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애초 ‘해고’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인데, 정작 고인은 청주방송과 그 어떤 계약서조차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고인이 14년이나 이어진 하루하루의 업무 내용을 일일이 다 증명하지 못해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청주방송 역시 고인이 사측에 전혀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다른 일까지 병행하며 개별적으로 일부 프로그램 제작만 도왔음을 ‘계약서’ 등 객관적 자료로 증명해야 온당하다. 이토록 노동 현실과 상식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법과 사법부는 대체 왜 존재하는가?

 

부릴 때는 ‘노동자’, 권리 요구하면 ‘프리랜서’…죽음의 고리를 끊자

2000년 대 이후 방송계에도 이른바 ‘노동유연화’가 횡행하면서 여러 직군에 ‘프리랜서 계약’ 등 신종 비정규직이 만연했고 ‘외주제작’도 일상화됐다. 이 때문에 동일한 노동을 제공함에도 차별과 부당해고에 노출된 방송 노동자가 속출했다. 소위 찍히면 업계 내 경력 연장이 불가한 방송계의 폐쇄적 특성으로 인해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모순은, 2016년 CJ E&M 소속 고 이한빛PD, 2017년 EBS <다큐프라임>을 외주제작하던 박환성·김광일PD을 떠나보낸 뒤에야 공론화됐다.

 

외주제작 분야에 표준계약서를 당국이 권고하는 등 소폭 개선이 있으나 ‘방송계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청주방송 고 이재학PD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다른 PD들은 하지 않는 간부들의 비서 또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떠맡아야 했다. 청주와 지근거리에 있는 대전에서는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가 역시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부당한 프로그램 하차, 업무 공간 배제 등 탄압에 놓여있다. 부릴 때는 ‘노동자’, 권리를 요구하면 ‘법적으로 해고가 당장 가능한 프리랜서’라는 뒤틀린 인식이다. 그리고 그 ‘전가의 보도’를 사법부가 인정해준 것이 결국 고 이재학PD를 벼랑 끝에 내몰았다. 부당한 차별을 없애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방송계가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길 촉구한다. 노동자의 죽음을 사실상 방기한 법원 역시 ‘프리랜서 노동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법리와 판단이 필요한지 면밀히 검토하고, 차후 판결에서 ‘인권의 최후 보루’임을 입증하길 바란다.

 

 

2020년 2월 6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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