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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핵심협약 비준, ‘노조할 권리’ 아직 멀다
김영훈(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록 2021.03.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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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열린다.

 

전쟁범죄와 ILO 기본협약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미쓰비시 일본법학 교수(Mitsubishi Prof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의 논문 <태평양 전쟁 당시 성(性)계약>에 대한 비판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AP통신은 램지어 교수 논문 논란을 보도하면서 3월로 예정된 학술지 게재가 미뤄졌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램지어 교수 주장이 “전시 잔혹행위를 가리려는 일본 극보수파가 지지하는 견해”라고 보도했고, 인디펜던트지는 “하버드대 교수가 한국인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매춘을 했다는 주장으로 분노를 촉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급속도로 경색된 한일관계 역시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확정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등 경제적 보복 조치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별 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이지만, 속내는 ‘자발적 매춘부’ 주장처럼 일제의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저임금 중노동으로 전쟁물자 생산에 희생된 식민지 청년들은 강제징용 노동자가 아니라 돈 벌기 위해 일본으로 온 ‘자발적 구직자’들이라는 궤변이다.

 

고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일제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문서 중 하나는 필라델피아 선언과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5월, 필라델피아에 모인 각국 노사정 대표들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국제노동기구 설립목적에 관한 헌장을 채택하고, ‘사회정의에 기초할 때만이 항구적인 세계평화는 가능하다’는 대원칙을 재확인했다.

 

‘노동의 상품화’ 막기 위한 국제사회 약속

 

20세기 초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과 생산력 증대가 인류 행복은커녕 왜 참혹한 전쟁으로 귀결되었는가? 당시 칼 폴라니가 허구적 상품이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화한 결과였다. 노동이 상품화되고 노동자를 기계 취급하는 순간 유대인이나 식민지 피압박 민중들은 전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노동의 상품화’와 전체주의 부활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 약속이 국제노동기구 ILO 협약이다. 그리고 190개 협약 중 모든 회원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협약을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이라고 한다. 노동자가 스스로 단결하고 사용자,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단체교섭을 통해 노동조건을 결정해 나갈 권리 등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 4가지 영역에 8가지 협약이 해당한다.

 

일본 정부가 주장하듯이 피고용인 개인이 국가(일제)나 거대자본(미쓰비시 중공업 등)을 상대로 한 ‘자발적 계약’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노예계약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단결하여 집단적으로 교섭하고 투쟁할 권리는 전체주의자들로부터 노동의 상품화를 막을 수 있는 시민들의 보편적 인권이 된다.

 

8가지 기본협약 중 가장 오래된 협약은 1930년 채택된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협약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자국 노동자들과 식민지 피압박 민중들에게 행한 수많은 전쟁범죄 중 근본적인 범죄는 침략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강제노동, 즉 자유의사에 반하는 노예노동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지금도 ‘자발적’ 운운하면서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위안부 문제는 ILO가 금지하는 성노예 강제노동이고 강제징용은 더 말할 것도 없는 노예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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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지난 2월 18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국회 정문 앞에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동의안 처리·노조법 재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30년 만에 ILO 협약 비준됐지만...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함께 진주한 미 군정은 점령 초기 재벌을 해체하고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노동조합 육성정책을 펼쳤다. 물론 1949년 중국 공산화와 한국전쟁 이후 레드퍼지(Red Purge) 정책으로 선회하기 전까지는 미국도 나치즘과 전체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라였다.

 

지난 2월 26일 국회에서 ILO 기본협약 제29호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 제87호 단결권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제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에 관한 협약 등 3개 기본협약 비준동의안이 의결되었다. 대한민국이 1991년 UN 가입과 함께 ILO 회원국이 된 이래 실로 30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제105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은 정부가 이번에도 분단 상황과 국가보안법 등을 이유로 비준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렇듯 한반도 평화와 노동기본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매일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프리랜서 등 비임금 노동자들에게도 보편적 시민권인 ‘노조할 권리’가 보장되는 출발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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