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흥미위주 신상털기 선정보도 대신 디지털성범죄 근절방안 모색에 나서라
등록 2020.03.2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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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추악한 실체가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반인륜적 범행수법 뿐 아니라 아동·청소년을 포함한 불특정 여성들의 피해규모가 방대하고 불법 영상물 이용 가담자가 26만 명으로 추정되면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n번방’ 가담자 전원의 명단을 공개하고 철저히 수사해 엄벌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5건에 500만명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소라넷, 다크웹, 웹하드 카르텔 등으로 지속되어온 디지털성범죄 고리를 이번엔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가해자 신상털기는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한 우리 언론의 보도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흥미위주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놓으며 본질은 놓치고 선정성만 쫓는다는 비판을 받았던 성폭력 사건 보도관행을 답습하는데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핵심 가해자인 ‘박사’ 신상이 공개된 이후 언론은 신상털기식 보도와 개인을 괴물로 묘사하는 악마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가해자 개인에 초점을 맞춘 보도는 성착취 가해행위를 축소하고, 성범죄의 구조적 측면을 가려 사건의 본질을 흐릴 위험성이 높다.

 

한겨레가 2019년 11월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라는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n번방’ 사건을 보도했을 때 관심을 보인 언론사는 없다시피 했다. 올해 초 SBS <궁금한 이야기 Y>,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국민일보 <n번방 추적기> 등을 통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3월 18일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올 때까지 대부분 언론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SBS가 3월 23일 단독으로 가해자 이름과 얼굴을 <8시 뉴스>를 통해 공개하면서 신상 관련 보도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일례로 ‘박사’ 검거 이전에는 한 번도 ‘n번방’ 사건을 지면에 보도한 적 없던 조선일보는 3월 24일 지면에서 <장애인 돕던 오빠가 ‘n번방’ 그놈이었다> <n번방 그놈 조주빈 범죄 기간에도 봉사> 등을 통해 가해자를 ‘그놈’이라 칭하며 평소 자원봉사하던 ‘선량한 청년’이었다고 보도했다. 가해자 개인의 이중성에 초점을 둔 이날 보도가 조선일보의 ‘n번방’ 첫 기사였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온라인판에서는 <단독/고교생 조주빈의 댓글 “아동 음란물, 걸릴 확률 낮아요”>를 통해 가해자가 포털사이트에 올린 글을 찾아내 실었다.

 

사건의 본질과 관련 없는 개인 신상이나 행적을 쫓는 보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3월 24일 <낮엔 보육원 봉사, 밤엔 n번방 박사… 두 얼굴의 조주빈>에서 “그(가해자)는 외모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라거나 “군대에서 후임과 갈등을 겪다 다른 부대로 전출됐다”고 강조했다. 머니투데이는 <여자만 5000명 넘게 팔로우... 조주빈 SNS 보니>에서 가해자의 SNS 행적을 쫓기도 했고, 연합뉴스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전문대 다닐 때 평점 4.17 우등생>에서 학창시절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점을 부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군대 동기의 발언을 인용해 가해자가 군대에서 후임을 괴롭히던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이였다는 보도, 가해자가 극우성향 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에서 활동하고 특정지역 비하 발언을 했다는 ‘카더라 식’의 보도가 잇따르기도 했다.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위한 사회구조에 주목해야

성착취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되풀이된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 2차 가해도 성범죄의 원인을 사회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도록 했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는 미성년자를 포함해 74명에 이른다. 언론은 경쟁적인 취재로 피해자나 그의 가족에게 2차 가해가 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피해자 신상이 노출되지 않도록 유념하고,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도 지양해야 한다. 피해자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구제책 마련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소라넷, 다크웹, 웹하드카르텔 등 불법 촬영 영상 등이 유통되던 수많은 성범죄 게이트가 있었다. ‘n번방’ 사건 역시 여성 상품화와 성적 대상화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 명백한 디지털성범죄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건이 터지면 공분이 끓어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여기엔 대중이 관심 가질 만한 사건이 생기면 맹렬하게 보도하다가 관심이 가라앉았다 싶으면 순식간에 외면해 버린 ‘냄비언론’의 책임도 크다. 결국 오랜 시간 성착취 범죄에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해 온 사회가 결국 ‘n번방’ 사건을 낳은 것이다.

 

이제라도 언론은 디지털성범죄의 근원을 파헤치고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성착취 범죄가 반복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찾아내는 보도에 집중해야 한다. 성착취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사회인식 변화, 법제도 개선, 예방프로그램 도입 등을 촉구하고, ‘n번방’ 사건에서 드러난 위기 청소년 문제, 피해자 영상 문제,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방식의 성착취 문제 등을 해결한 대안모색에 적극 나서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2020년 3월 26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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