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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엄주웅)
등록 2013.12.1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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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포커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정치심의'를 말한다 

'기울어진 운동장'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엄주웅 (민언련 정책위원, 전 방통심의위 위원)



가령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한다고 치자. 심판이 세 명은 필요할 텐데 두 명은 경기 개최국에서, 한명은 상대팀 나라에서 뽑으면 어떨까? 경기는 해보나 마나일 테고 관중은 썰렁하다 못해 욕을 지독히 퍼부을 것이다. 이런 가당치 않은 상상을 해보는 것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행태가 그와 비슷해서다. 


‘기울어진 운동장’


잘 알다시피 방송통신심의위는 이른바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다는 심의 기구이다. 방송의 내용이 어린이, 청소년을 보호하고 약자, 소수자에게 차별적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등의 명분이야 달리 따질 이유도 없다. 다만, 선정성의 기준이나 방송영상 표현의 수용 수준은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므로 다양한 입장과 시각을 갖춘 위원들의 합의로 운영되도록 한 것이다. 관련법에 특별한 전문성이나 자격 요건이 없이 9명의 위원으로 위원회를 만들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이 위원회의 구성이 정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정부(대통령) 및 여당이 6명, 야당이 3명의 위원을 추천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들이 방송의 선정성이나 폭력 묘사 등을 심의하는 것까지야 뭐 그다지 문제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 대립되는 보도 관련 프로그램을 심의하는 데에 이르면 드디어 몰상식한 일이 벌어진다.


정부-여당과 다른 시각을 다룬 방송이 심의에 올라오면 결과는 뻔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경우 6대3의 표결로 해당 방송이 불공정하다며 제재조치를 결정한다. 지난 정부 들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신설된 이래 언제나 그랬다. 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PD수첩 광우병 보도를 시발로 4대강, 미디어법, 방송사 파업, 천안함 등의 사안을 다룬 공영방송의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제재를 받았다. 그 외에도 잇단 통제와 억압으로 인해 공영방송 쪽을 침묵케 했다 싶더니 이제는 종편인 JTBC까지 도마에 올렸다. 이러니 불공정한 건 오히려 심의 절차인 셈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열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검사 노릇하는 판사 


더 나아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그 운영이 민주적 상식에 맞지 않는 면이 다분하다. 방송심의규정도 자신들이 만들고, 심의 안건을 스스로 상정해 결정을 내리고, 벌금 등 사실상의 행정처분도 부과할 수 있는 등, 어찌 보면 방송내용규제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기구다. 


심지어 시청자가 제기하지도 않은 사안을 자체 조사하여 심의에 올리는 등 설립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방송이 불공정한지의 여부는 이해당사자가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위원회 자신이 제기한다면 애당초 스스로가 편파적인 존재임을 고백하는 셈이다. 판사가 검사 노릇까지 하는 꼴이랄까.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포괄 심의’라는 것도 공정성 심의의 원칙에서 보면 웃기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지 않은가. 


또한 현재의 심의 방식에서는 누구라도 방송을 보다가 불만이 있어 신고만 하면 심의가 개시된다. 인적사항 외에는 신고에 따르는 특별한 요건도 없다. 그러면 위원회 사무처에서 해당 프로그램을 분석 정리해서 어떤 점이 어떤 조항에 위반될 수도 있다는 요지의 안건을 만들어 올린다. 방송사측의 의견은 제재조치를 결정하려 할 때에서야 들을 수 있다. 


적어도 보도 프로그램에 관한 한 위원회는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 보도 공정성과 관련해 불만이 있는 시청자는 우선 방송사에 클레임을 제기하게 하고, 방송사는 이에 대해 해명 내지 항변을 하게 한 다음, 위원회는 해결되지 않은 양당사자의 주장을 놓고 판단하여야 한다. 심의의 문턱이 다소 높아지긴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고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심의 기간과 절차도 길어지고 위원회 운영도 다소 번거로워지겠지만 중립적 기구로서의 시늉이라도 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아니면 보도 프로그램은 심의에서 배제하든지....  


제재는 누가 받아야 할지?


보도프로그램을 심의에서 배제하는 것, 정말로 현재로는 그것도 유력한 대안이다. 6대3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칠 수가 없다면 말이다. 불공정한 기구에서 공정성을 따진다는 어불성설을 타파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방송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원론적인 상식에 비추어 봐도 그래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자유는 민주적 방송질서의 기본이며, 허위 왜곡 보도는 법의 다른 영역에서 얼마든지 제재할 수 있다. 언론중재위원회나 언론전담 재판부 같은 것도 있지 않은가? 


정치적 구성을 허용하고 있는 현행법상으로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합의적 기구다. 지금과 같은 6대 3의 다수결 구조가 계속 되풀이된다면 그것은 정부여당 6인만으로도 운영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며, 따라서 해체를 포함한 전면적 제도 개혁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진작부터 그 말로가 보이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근 공식 회의석상에서 일어난 반말이니 막말 파문을 보아하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야말로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 관계자에 대한 징계” 제재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프로그램 중지’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