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정치권은 공영방송에서 떠나야

아직도 관행이라니
서명준(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언론소비자주권행동 대표)
등록 2017.09.19 18:15
조회 285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방송 개혁”이라는 유령이. 1년 전엔 국회 주변을 떠돌더니 요즘엔 언론은 물론이고 정부와 시민사회, 언론노조 사이마저 돌아다니고 있다. 상식적인 사람치고 방송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상식적인 사람치고 방송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이런 결론이 나온다. 방송 개혁이라는 이름의 유령은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상식적인 시민에게서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제 개혁주의자들은 시민을 향해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경향을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유령의 소문을 선언으로 대체해야 할 절호의 시기가 닥쳐왔다. 

 

정치권이 생각하는 지배구조 개선 방법

 

여기까지는 저 유명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서두를 차용해서 쓴 것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진다. ‘선언’들의 형태는 다양하다. 가장 먼저 더불어민주당의 선언이다. 지난해 더민주당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른바 언론장악방지법이라는 이름의 선언이다. KBS 여야 추천 이사 비율 7대 4, 방문진(MBC 대주주) 6대 3의 현행 비율을 각 방송사 모두 이사진을 13명으로 통일하고 여야 추천 이사 비율을 7대 6으로 고치자고 한다. 사장 선임은 이사회 3분의 2 동의라는, 특별다수제 방식을 도입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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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5일자 세계일보는 단독으로 문 대통령이 방송법개정안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만약에 이 법안이 통과가 된다면 어느 쪽으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사장으로 선임되지 않겠느냐”며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세계일보 8월 25일자 1면)

 

다만 이 ‘선언’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우선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여전히 국회 소관 상임위인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조차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있다. 지난달 22일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문 대통령은 이 개정안이 시행되면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법안 처리가 최선인지 검토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이효성 방통위원장도 14일 대정부질문에서 “덜 정파적인 구성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예 다른 내용의 선언도 있다. 정의당의 경우인데, 이사진을 원내정당이 한 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이사는 임의로 선정된 시민추천인단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이 선언은 ‘공영방송 이사 국민면접제’라고 한다. 한겨레에 따르면,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추천인단이 100명이면 이들이 생방송으로 이사 후보자에 대해 공개 면접을 보는 것이다. (추천인단) 득표순으로 이사를 뽑는다”고 말했다. “사법체계처럼 국민배심원제를 공영방송에도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MBC 해직기자로서, 지금 암 투병 중인 이용마 기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다.  

 

공영방송 이사추천 관행, 방송은 정치투쟁의 장이 아니다

 

여기 이 선언들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방송을 공공서비스라고만 보는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자유한국당도 정의당도 그리고 대통령조차 공공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로 선언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이들은 모두 정치투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공(公)은 공(空)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사(私)의 집합체다. 가령 대표적인 공적 영역인 국가는 사익을 실현시키는 장이다.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의 사익이 갈등하는 장소가 국가이며 이는 방송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언론노동자와 방송자본의 대립은 앞서 언급한 ‘선언들’을 둘러싼 여러 정치세력들의 이견과 갈등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방송선진국인 독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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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명이라는 방대한 이사회를 갖고 있던 독일 공영방송 ZDF는 얼마 전 60명으로 인원을 대폭 줄였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인데, 정치권의 영향을 더 줄이라는 판정이었다. (사진 : ZDF 홈페이지)

 

77명이라는 방대한 이사회를 갖고 있던 독일 공영방송 ZDF는 얼마 전 60명으로 인원을 대폭 줄였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인데, 정치권의 영향을 더 줄이라는 판정이었다. 정치권 인사의 비율이 크게 감소하고 시민단체 비율이 늘었다. 헌재가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실현시키는 모습이 조금 부럽긴 하지만, 방송이 늘 계급 갈등이 일어나는 투쟁의 장이라는 점은 독일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 

 

물론 우리와 완전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하다. 이른바 관행이라는 현상이 그들에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영방송 KBS와 MBC 이사를 여당과 야당이 추천하고 있는데, 이는 방송법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관행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선언들’은 정치권 그들만의 모순과 갈등에 불과할 뿐이다. 현행 구조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것을 법에 명시하면 된다. 그럴만한 정치적 자신감이 없다면 대체 무엇하러 정치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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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5일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열린 9차 ‘돌마고 파티’ 모습. 참가자들이 언론적폐인사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격파돼야 하는 ‘관행’

 

얼마 전 언론노동자들의 방송파업이 시작됐다. 소문을 들은 시민들은 매주 금요일 서울 시내에서 모여 “돌아오라 마봉춘(MBC), 고봉순(KBS) 불금 파티”를 벌이며 응원하고 있다. 상식적인 시민의 사적 이익을 실현시켜주는 방송을 갖고 싶은 정당한 욕구가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을 모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언’에 나서고 있는 모든 개혁주의자들은 이 상식적인 시민세력의 주문을 외면해선 안 된다. 1년 전의 더민주당 개혁안도, 오늘의 대통령이나 방통위원장의 판단도 이번 기회에 더 좋은 공영방송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어떤 선언이 현실에서 힘을 얻을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확실한 것은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여야가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황당한 지배구조는 반드시 격파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치권은 관행을 없애버리고 공영방송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방송법에 이사회 규정을 강화하고 관행의 폐단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선언’에 동참한 개혁주의자들이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시시비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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