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 [회원인터뷰] "동아투위는 내가 오욕의 역사를 살지 않게 해준 은인" (윤활식 회원)
등록 2019.01.2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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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유언론실천재단의 이사장이자 동아자유언론 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위원장인 김종철 선생이 글을 보내주셨다. 선생은 종종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주옥같은 글을 보내주셨고, 나는 흔쾌히 그 글을 민언련 <e-시민과 언론>에 게재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온 글은 언론비평이나, 시대를 꾸짖는 글이 아니었다. <해직 44년 만에 구순 맞은 언론인 동아투위 윤활식 위원에게 꽃을 바친다>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한 해직언론인에게 보내는 따뜻한 헌사가 담겨 있었다.

윤활식 선생은 민언련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민언련의 전신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언협)의 창립 당시 발기인이었으며, 실행위원을 맡아주셨다. 지금은 민언련 고문이다. 그런데 선생의 구순을 몰랐다니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오죽하면 전화를 하신 김종철 선생께 “선생님 그런데 왜 저는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요!”라는 한탄인지 항의인지 모를 질문을 했다. 김종철 선생은 “나도 얼마 전에나 알았다. 우리가 구순잔치를 해드리려고 하니 그날 오면 된다.”며 다독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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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참느라 혼났던 따뜻한 구순잔치

윤활식 선생은 1월 8일 구순을 맞이했다. 1월 17일, 서촌의 허름한 식당에서 윤활식 선생의 구순잔치가 열렸다. 작은 식당을 가득 채운 분들 모두가 우리 언론자유투쟁의 산증인이신 분들이었다. 이명순 전 이사장은 동아투위에서는 구순잔치의 사회자로 활약하셨다. 조강래 선생은 선물 접수 담당자가 되어 “좋은 거 가지고 오신 분들 줄을 서서 접수하라”라고 농담을 하셨다.

동아투위 많은 어르신들이 오셨고, 이해동 목사, 김중배 언론광장 공동대표, 자유언론실천재단과 새언론포럼의 많은 분들이 오셨다. <뉴스파타>는 유난히 동아투위 어르신들을 정신적 지표로 여기는데, 이번에도 김용진 대표를 비롯해 여러 기자들이 참석했다. 이날 식사비를 모두 내셨다는 김용진 대표는 “선배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유언론, 독립언론의 기치를 어아가겠다”라고 말했다. <한겨레> 양상우 대표이사는 “감회가 깊다. 선배님들의 고통 속에 오늘의 한겨레나 뉴스타파가 있는 거 같다”며 꽃다발을 전했다. 동아투위 이부영 선생은 “오늘 같은 자리는 우연히 생기는 자리가 아니라 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오랫동안 이끌어달라고 말씀하셨다.

축하 말씀 모두가 마음에 와 닿았지만, 동아투위 허육 선생이 “우리 윤 차장님이 구순이라니…”라며 유쾌하게 말문을 여실 때는 울컥 눈물이 터졌다. 이분들이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45년이 지났다. 세월을 따라 이분들은 ‘늙고 병들었지만’, 마음은 동아일보에서 함께 일하던 그 시절에 멈춰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예전에 윤활식 선생이 “에잇 나는 언제까지 만날 윤 차장이냐. 윤 국장 한번 못해보냐”라고 했다며 박장대소할 때는 눈은 울고 입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투위는 윤활식 선생께 금반지를 선물했는데, 선생은 유난히 반짝이는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환하게 웃으셨다. 윤활식 선생은 “적당히 살다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이렇게 후배들과 여러분들이 베풀어준 잔치상을 받는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점심시간에 하는 짧은 잔치였기에 다들 다음 일정에 쫓겨 단체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나는 이날 이 식당 앞 계단에 어르신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잠깐 아주 따뜻한 봄볕이 비춘 겨울의 한 순간이었다.

 

동아투위는 나를 비겁하게 살지 않게 해준 은인

“1975년 3월 17일 미명, 자유언론 사수를 외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나는 폭도들에게 떠밀려 동아일보사 문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꽝’ 하고 정문 빗장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철제 셔터가 내려졌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열정을 바쳐 일해 온 동아방송과 나의 영원한 작별의 순간이었다. 이른 봄 새벽 거리는 유난히도 쌀쌀했다.”

 

어떤 마음으로 동아투위에 참여하셨나요. 당시 ‘차장’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초급 간부시고 아이들도 한참 공부할 때였을텐데요. 흔들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은 가슴이 떨릴 정도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어요. 그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차장, 그러니까 선임 프로듀서 중에는 저 혼자 동아투위에 참여하게 되었죠.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는 많은 차장, 부장들이 “후배들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이 깊어지고 “회사에 남을 것이냐 나올 것이냐”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다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 유일한 핑계는 ‘처자식’이었죠. 나도 그때 위로는 고등학교 3학년, 밑으로는 초등학생 6학년까지 아이가 넷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만용’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편집국 사람들 중 특히 이부영, 성유보 등이 앞장섰어요. 그 사람들과 저는 연배가 15년 가까이 차이 났는데, 그들의 주장은 늘 논리 정연했고, 하는 일 모두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옳다는 공감대가 모이면서, 나중에는 동아방송 피디들이 기자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게 된 거죠.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한 것이지만, 나는 동아투위를 함께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마흔여섯에 회사에서 쫓겨나 이렇게 45년이 다 되도록 복직조차 못하고 살고 있지만, 오히려 나는 우리 후배들에게 고마워요. 그들은 내가 비겁자가 되지 않게 해 줬어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진짜 고맙다, 나에게 오욕의 역사를 주지 않아서 고맙다. 당신이 나를 살렸다, 은인이 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신문기자만 함께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동아방송도 소개해주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이야기해주세요.

동아방송은 한마디로 동아일보사의 라디오 방송국이었죠. 당시 동아일보에 편집국이 있었고 방송국이 있었던 거예요. 난 라디오 드라마 제작 PD였어요. 동아방송에서도 보도기능을 담당한 뉴스부는 방송국 소속이 아닌 편집국 소속이었고요. 방송국은 오락과 교양 쪽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라디오 드라마 PD는 최고의 인기직업이었습니 다. 당시는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국 광고수입을 벌어들이는 주요 통로였을 정도였죠. 저는 남녀가 사랑하는 연애 드라마는 손도 안 댔어요. 대신 다큐멘터리 성 드라마를 만들었죠. 조선총독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1년 가까이 제작했고, 태평양전쟁을 다룬 드라마를 만들어서 2년간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으로는 한국전쟁을 다뤘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뒤 어떻게 지내셨어요?

처음엔 정말 막연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철강회사를 다니던 동생이 본인도 직장이 싫다면서 같이 사업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난데없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자리를 잡아갔어요. 내가 사업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현물조사를 한번 해보니 당시 돈으로 회사 가치가 3천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건 그 당시 나름 괜찮은 것이었어요.

 

민권일지 사태로 투옥

 

“동아투위는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명동 한일관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그 날 배포된 ‘동아투위소식’엔 평소와 달리 지난 1년 동안 제도언론이 철저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은 민주·인권 관련 사건 120여건이 특집 형태로 실려 있었다. 기념식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던 홍종민 총무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고, 뒤이어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장윤환·박종만·김종철·정연주 위원 등이 연행되어 모두 7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동아투위는 나를 위원장 대리로 선출했다. 그 해 연말, 동아투위는 가족과 민주인사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송년모임에서 구속된 7명의 동지를 하루 속히 석방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고 동지들의 근황 등을 소개한 ‘동아투위소식 송년 특집호’를 배포했다. 그러자 경찰은 이를 문제 삼아 나와 이기중, 성유보 3명을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추가로 구속했다. 동아투위 동지 10명이 한꺼번에 영어의 몸이 된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민권일지 사태로 구속되셨는데요. 그럼 사업을 하시다가 그런 일을 당하신 건가요?

그렇죠. 1978년 민권일지 사태로 안종필, 김종철 등 7명이 연행되었고요. 옥에 갇힌 7명을 석방하라는 유인물을 돌린 것이 문제가 돼서 나와 성유보 등이 셋이 또 끌려 들어갔죠. 그렇게 10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여럿이 같이 가서 그런지 하나도 두렵지 않고 든든했어요. 남들은 감옥에 가면 밥도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한다는데, 나는 밥도 잘 먹고 그럭저럭 견딜만했어요. 10개월 정도의 수감생활이 내 인생을 바꾸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하하. 도대체 감옥이 견딜 만했다니, 농담이신 건지 진담이신 건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10명이 함께 수감되었다지만 그분들과 한방에서 지낸 게 아닐 텐데 든든하셨다니요. 그리고 감옥생활이 인생을 바꾸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니 조금 더 설명을 듣고 싶어요.

우린 모두 독방 생활을 했었어요. 우리 같은 사상범들은 다른 죄수들에게 사상을 전염시킬 수 있다며 모두 독방에 가둬놨죠. 그런데 나는 그 독방이 아주 편하더라고요. 게다가 난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는데, 왜놈들이 서대문형무소 벽을 얼마나 두텁게 지어놨는지 겨울에도 춥지가 않았어요.

또한 나는 1979년 감옥에 있었던 건데요. 당시는 학생 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감옥이 아주 성황이었어요. 사회 속 반체제적인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곳이었고 모두가 동지들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여기저기서 ‘잘 잤냐’고 인사하고, 성유보 선생이 감옥 안에서 삼일절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사실 동아투위는 어딜 가도 환영과 대접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우리는 비굴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나 그 가치를 알아줬던 것 같아요.

내가 감옥에서 배운 것은 이런 거예요. 사람이 생면부지 사람들과 생소한 장소에 갇히면 당황스럽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도 사실은 많이 곤혹스러웠고 감옥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나 결국 감옥에도 질서가 있을 테니 하나하나 배우며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었고요. 그 덕분에 적응하고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경험 이후, 저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다시 처음부터 차곡차곡 배워 시작하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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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이 마흔여덟에 소신을 위해 일자리를 내려놓더니, 이제 좀 살만하게 사업을 하시다 또 느닷없이 감옥에 끌려가셨어요. 가족들의 원망은 없었어요?

집사람이나 아이들도 결국 아버지 하는 일을 닮는 모양입니다. 나는 집사람이 참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의연했어요. 그리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집사람이 정말 매일매일 면회를 왔어요. 사람이 뭐 살다 보면 하루 건너와도 되고 며칠쯤 쉬어도 되잖아요. 힘드니 이렇게 오지 말라고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렇게 매일 면회를 오더라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그렇게나 의연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 가서 놀림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대단한 집 아들”이라고 칭찬을 들었다고 해요. 참 고맙죠.

 

출소하신 다음에는 또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10개월 만에 나오고 보니 동생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서 가게가 사실상 거덜 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알로에를 처음 한국에 전파한 김정문 씨가 알로에 가게를 하나 내라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느닷없이 광화문에 알로에 가게를 하나 냈어요. 그런데 알로에가 방송을 통해 홍보가 되면서, 한동안 정말 장사가 잘 됐습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가는데 밥을 먹을 틈도 없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6개월 동안 장사진을 이루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알로에 장사에 뛰어들었고요. 우리는 알로에 생초를 팔았는데 이제는 경쟁업자들이 알로에젤을 팔면서 손님들이 다 젤 쪽으로 몰렸습니다. 종국에는 문 닫아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알로에 가게를 낸지 1년여 만에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유보 씨가 이왕 가게를 얻어놨으니 이제는 꽃가게를 하자고 해서 ‘암스텔담 꽃가게’를 열었습니다. 그 꽃가게는 2년 가까이 끌고 갔네요. 그러다가 결국 한겨레가 창간되면서 사업을 완전히 접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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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련을 실행위원으로 『말』지를 함께 세상에 내놓다

 

“그 무렵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됐는데, 나는 여기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 민언협은 월간지 『말』을 발행, 유신정권보다도 더 악랄한 5공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진실 보도를 위해 분투했다. 『말』은 모든 제도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대안언론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해나갔다. 그러니 자연히 탄압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잡혀가고, 압수당하고, 처음부터 곡예의 연속이었다.”

 

선생님은 민언련의 전신인 언협 창간 발기인이세요. 게다가 실행위원도 하셨거든요. 그 시기에 또다시 이런 일에 가담하는 것은 어려운 결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언협은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시게 되셨을까요?

언협을 만들 때, 동아투위 쪽에서는 맨 처음에 참여한 사람이 송건호 선생님과 성유보 씨, 나, 김인환 씨, 이병주 씨 등이었어요, ‘말’지 편집을 성유보 씨가 담 당했죠.

나는 편집 업무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머릿수 채우는 역할밖에 안 했습니다. 제가 언협에 함께 한 이유는 내가 출중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아투위 사람들이 대부분 호구지책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내가 가장 시간이 남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내가 도와야 한다고 마음먹은 거죠.

 

『말』지 제작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주세요.

당시 『말』지 만드는 게 항상 어려웠어요. 글을 쓰고 비밀리에 인쇄를 하고 제본을 하고 다시 그걸 비밀리에 옮기고 배포하고 하는 일이 모두 위험했으니 고충이 많았어요. 그때 책을 배포하는 본거지가 바로 광화문에 있는 우리 알로에 가게였어요. 선임기자가 운전을 해서 한밤중에 책을 우리 가게에 쌓아놓으면, 판매 사원들이 나가서 팔았습니다. 매번 “이번엔 책이 나올 수 있을까” 하면서 살았던 시절입니다.

아무튼 난 언협에서 그다지 한 일이 없어요. 나는 거기서 잡지를 만들고 배포하고 판매하고 하는 일익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성유보 등은 내 알로에 가게에 책을 놓고 팔아주는 것이 고맙다고 늘 그랬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남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을 많이 했다 싶은데요. 하지만 나는 또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보도지침’ 사건 이후 『말』지 계속 제작할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요. 당시 선생님은 어떤 생각이셨어요?

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구속되면서, 말 지를 계속 만들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계속 말지를 찍는 것이 너무 위험하고, 이런 군사 독재정부는 곧 끝날 테니 우리도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의견도 많았어요. 나는 오히려 군사독재정권이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니까 더욱 『말』지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때 『말』지 최민희 기자가 고집스럽게 우리가 『말』지를 만들 수 있도록 함께 힘을 실어줬어요.

 

한겨레 입사는 어떻게 결심하셨는지요.

사실 알로에 장사가 조금 싫어질 시점이었습니다. 애초 신문 기자가 아니었던 내가 한겨레에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요. 그냥 말단서부터 시작하더라도 일을 거들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국민주를 팔고 정리하고, 명단 작성하고 봉투 붙이고 이런 일을 했고요.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 나중엔 주식관리 실장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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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저지른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나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큰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큰돈이라도 만져 보려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또 그런 잘못이 되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가 저지른 과거의 모든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혀야 한다.”

 

다시 동아투위 이야기로 정리하죠. 동아투위에 대한 정의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동아투위 위원들 중 스물아홉 명 정도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병석에 누워 계신 분도 두세 사람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과거사화해위원회 이런 걸 만들 때만 하더라도 뭔가 새롭게 시작해볼 의욕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고, 숱한 고비들을 겪으면서 ‘부당한 해직 등이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을는지’ 하는 답답함이 있어요.

최근 ‘양승태 사법농단’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양승태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배상이 필요 없을 거라는 정부의 의견을 대법원 판결에 반영했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대법원이 동아투위 관련해 해직언론인들의 명예회복과 배상의 길을 막아버렸고, 그나마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과거사위 결정조차 무력화시켰잖아요. 나는 양승태 대법원이 우리 사안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까 그런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문재인 정부가 되었으니 다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문 정권이 들어섰으니 다시 어떤 계기는 마련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작년 동아투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기도 했지요. 사실 동아투위 기념식에 대통령이 직접 축사를 하며 사과를 한 것은 처음이기도 합니다. 그 점은 우리들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사안을 언론들이 제대로 조명해주지 않으니 답답하죠. 심지어 한겨레에서조차 실어주지 않아서 서운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역사에 묻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계기로든지 다시 살려야 하고요. 우리 내부에서도 심기일전하자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어떻게든 동아투위의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 나는 집사람을 간병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예전에는 꼼짝도 못 하다가 데이케어센터가 생긴 이후, 아내가 낮 시간대에 거기에 가면서, 저도 그 사이엔 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아내가 다시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억력도 조금씩 다시 살아나는 걸 느낍니다.

 

 

내가 “감옥에 계실 때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면회를 오셨다는 사모님이니 무조건 잘하셔야겠어요”라고 농담하자, 윤활식 선생은 “맞아요”라며 웃으셨다. 우리는 이제는 인민 미술관이 된 옛 동아일보 1층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동아일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을 나서며 선생은 “여기가 동아일보 광고국이었어요”라며 한참 공간을 둘러보셨다.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일생 동안 역사와 가족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일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단순한 일인가. 이런 분들이 우리 민언련을 만들어서 활동하셨다. 그 역사성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활동한다.

정리 김언경 사무처장/ 사진 이병국 이사/ 녹취 박철헌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