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3)
등록 2014.06.10 13:07
조회 1361



[언론운동사]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유신체제와 신군부 군사독재 시절 언론운동의 흐름 (3) 


 


1975년 3월 11일자 <조선일보>. 해당 기사에는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이름이 적혀 있다.


1975년 3월에 차례로 쫓겨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각각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를 조직해서 자유언론 선언 운동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다. 그리고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는 유신 독재 시절을 꿋꿋이 견디고 있던 수많은 언론인들에게 진정한 언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1979년 경향신문 해직기자이자 전 월간 <말> 편집장 박우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75년의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기자들에게는 언론자유운동의 원형(原型) 같은 사건입니다. 후배 기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1975년 말에 경향신문에 들어갔는데,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에 동조하지 않고 그대로 언론계에 남아 있는 선배들은 대부분 부채의식이나 자괴감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떤 선배들은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이야기 꺼내는 것도 터부시하고는 했죠. 그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약점과 치부가 드러나니까요. 저도 선배 한 명이 1975년 동아와 조선의 상황을 이야기해 줘서 알게 됐어요.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같은 건 알고 있었지만 동아 기자들이 회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고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자세히 몰랐습니다. 참언론이란 무엇일까, 언론의 자유란 또 무엇일까 하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게 되기보다는 동아와 조선의 선배들이 벌인 자유언론 투쟁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더 생생하고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죠.” 


조선투위와 동아투위는 ‘부당해고 철회’와 ‘전원 복직’을 외치며 집회를 열거나 유인물과 소식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 갔다. 그리고 당시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과 함께 연대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1978년 10월 24일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지난 1년간 언론사들을 통해 보도되지 않거나 왜곡 보도된 사건들을 묶어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일지>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내세우며 동아투위 위원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한국의 모든 신문들은 동아와 조선 해직 사건 이후로 본격적으로 제도 언론에 포섭됐습니다. 언론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죠. 게다가 기자들에게 주는 월급도 대폭 올랐어요. 기자들의 가난한 상황이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을 촉발하니 기자들 잘 대접해줘야 한다고 정부에서 압력을 넣은 게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기자들은 언론인이 아니라 정권의 홍보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정권은 그런 기자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였어요. 해직됐다가 복직한 기자들도 얼마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언론자유 운동을 벌인 사례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신홍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뒤 한 6개월 동안은 날마다 회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했어요. 동화면세점 뒤에 있는 여관방 하나를 잡아 동아투위 사무실로 썼죠. 밤에 만든 유인물을 다음날 아침에 나가 동아일보사 앞에서 뿌리고, 시위 끝나고 나면 각자 유인물 한 움큼씩 들고 대학교든 종교단체든 담당 구역으로 가서 또 뿌리고, 밤엔 또 새 유인물 만들고, 그걸 6개월쯤 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 돼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되 10월 24일과 3월 17일엔 공식 행사를 하는 것으로 했죠.” (성유보) 


1970년대 중반 이후 잇따른 정책 실패와 경제 위기로 휘청거리던 박정희 정권이 1979년 마침내 거꾸러지기까지 보도 통제는 계속되었고 언론 자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말고도 다양한 언론사들에서 양심을 지키려는 기자들의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1978년에 조선일보에서 박정희 정권의 농업 정책은 실패라는 기사를 1면으로 보도한 적이 있어요. 그 시절 조선일보는 전혀 반정부 언론이 아니었는데도 1면으로 다룬 걸 보면 그만큼 농정 문제가 심각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정권 말기이기도 했고 흔들리는 유신 체제에 위기를 느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박정희가 그 기사를 읽고 노발대발했대요. 그래서 청와대에서 문화방송 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바로 반박 기사 내보내라고 했고 (당시는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통합돼 있었어요.) 농림부 출입기자가 기사 작성을 거부하니까 차장이 기사를 직접 썼죠. 가뜩이나 어용 신문이다 뭐다 해서 경향신문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수모를 당하고는 했는데 그 기사가 1면으로 나가면서 아예 얼굴도 못 들 지경이 됐어요. 통합 1기에서 5기에 이르는 기자들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통합된 이후 입사한 기자들은 통합 기수로 불렀어요. 통합 1기가 1974년에 입사한 기자들이고요.) 항의문을 작성했고 다음날 편집국장 앞에서 그걸 낭독한 다음 회의실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결국 편집국장이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명했고 저희는 농성을 풀었죠. 그게 경향신문 내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집단행동이었어요.” (박우정)


경향신문 기자들은 1979년 또 다시 일어서게 된다.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 노동자 한 명이 공권력이 휘두른 폭력에 목숨을 잃으면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뉴욕타임즈와 ‘미국 정부가 박정희 강압 통치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회견을 했고 법원에서는 김영삼 총재에게 직무정지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경향신문은 다른 신문들과 달리 ‘김영삼 총재’가 아닌 ‘김영삼 씨’라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김영삼 씨 호칭 문제도 있었지만 경향신문에는 그때 다른 문제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통합 1기부터 5기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집단행동에 들어갔고 그 일 때문에 편집국에서 기자 3명이 쫓겨났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고요.” (박우정)


1980년, 잠시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던 언론 자유는 5월 광주라는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유신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다시 언론 현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해직기자들은 이번엔 신군부라는 한층 더 흉악한 무리들과 맞서야 했다. 


“신군부는 79년 12.12 쿠데타 때부터 이미 언론 검열을 했어요.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에서 운영하던 검열반의 검열을 받은 뒤에야 보도를 내보낼 수 있었죠. 그래서 당시 한국기자협회 차원에서 검열 거부 운동을 벌이기로 했었는데 그게 5.18 직전이었어요. 5.18이 터지고 나서는 도저히 검열 거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요. 그래서 경향신문 편집부 기자들은 검열 받은 부분을 공백으로 처리해서 신문을 내자고 결의했어요. 얼마나 심하게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그런 뜻이 있었죠. 그래서 군데군데 공백인 채로 하루 신문이 나갔는데 그 때문에 계엄사령부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결국 편집국 간부까지 동원해서 더는 그런 식으로 신문을 만들지 못하게 했고, 공백 부분을 다른 내용으로 채워 신문을 만들게 했어요.” (박우정)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던 학살극은 언론을 통해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회사에서 파견한 취재기자들의 보고나 일부 외신 그리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던 기자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대강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그것도 환한 대낮에 마구 때려죽이고 쏘아 죽이는 군인들의 잔인함에 기자들 대부분은 엄청난 충격과 울분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계엄사령부가 발표하는 대로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던 전국 언론사의 기자들은 결국 5월 20일 즈음부터 부분적인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또한 기자협회는 각 언론사별로 긴급 기자 총회를 소집해 광주항쟁의 실상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은 제작 거부뿐이었어요. 차장 이상 간부들만 편집국에 남고 나머지 기자들은 밖으로 나와서 농성을 벌였죠. 그때 경향신문을 비롯해서 여러 신문사들이 제작 거부 운동을 했는데 경향이랑 중앙이 가장 치열하게 했어요. 광주항쟁이 진압되면서 다시 복귀를 했지만 신군부는 광주 다음으로는 언론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결국 언론통폐합 때문에 1980년 1년 동안 기자 1,000여 명이 잘려 나갔습니다. 유신 체제와 신군부에 맞서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그때 모조리 제거됐어요. 설사 현장에 남아있었어도 1987년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어요. 저는 6월 8일에 체포돼서 감옥에 있었는데 그때 밖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거죠. 반체제 성향의 기자, 상급자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는 기자, 비리를 저지른 기자 등등 신군부 보안사령부에서 귀신같이 집어 내 목록을 만들어 회사에 내려 보냈어요. 내부에 내통자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어떤 기자가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다는 정보를 보안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누가 동료를 팔아먹었는지 거론되긴 했지만 확인할 수 없으니 단정 지어 말하진 못했습니다.” (박우정)


수많은 기자들이 제작 거부에 참여했음에도 일부 간부들과 몇몇 기자들의 손으로 신문과 방송이 제작되고 보도되는 바람에 제작 거부 운동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신문이 발행되지 않거나 방송 보도가 방해를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군부는 언론사 건물 앞에 탱크까지 배치하며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확실한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광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되면서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 운동 역시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신군부에 맞선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세계 언론 역사상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량 해직과 언론통폐합이었다.




 보안사, 「언론대책반 운영계획」(1980. 3. 29.). 언론공작을 실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안사 내 별도로 구성된 언론대책반 운영계획. 표지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 사령관의 서명이 보인다. (출처 :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신군부의 언론 탄압은 1980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6월 9일 계엄당국은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고 있는 혐의가 농후하다”면서 현직언론인 8명을 구속하며 ‘언론소탕작전’을 시작했고 이어 7월 중순부터 8월 초에 걸쳐 ‘언론인 대학살’을 벌였다. 


해직자 명단은 7월 중순 무렵에 확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종 명단은 보안사령부의 주재로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등 관계자와 각 부처 대변인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결정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각 부처 대변인이 ‘관계대책회의’와 같은 이 모임에 이례적으로 참석한 것은 이들이 대부분 언론인 출신으로서 출입기자들의 성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해직 절차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신군부가 유신 정권 붕괴 후 설치한 기관)로부터 각 언론사에 지시된 ‘사직서 제출’에 따라 진행됐다. 언론인 모두에게 ‘의원사직서’(의원사직은 노동자 본인이 원하여 사직하는 것을 말함)를 내게 해 그중에서 골라 해직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일부 기자들은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티기도 했다.


언론인 대학살로 1,000여 명이나 되는 언론인이 해직당했고 언론사 40여 개가 통폐합되었다. 보안사가 작성한 ‘해직 언론인’ 명단에는 336명의 이름이 있었지만 나머지 600여 명은 보안사의 ‘언론 정화’ 요구에 굴복한 언론사 사주가 평소에 곱게 보지 않았던 기자들까지 한꺼번에 ‘정리’한 결과였다. 이어 1980년 12월에는 문화공보부 장관의 행정명령으로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담긴 ‘언론기본법’이 만들어졌다. 


보안사, 「언론창달계획 추진을 위한 언론사 대표각서 징구계획」(1980. 11.). 각서 징구는 대공처 요원들이 담당하게 하고, 18:00경부터 언론사 대표를 소환하여 대공처 수사과장 지휘 하에 각서를 징구하고 거부 시 수사 및 법적 처리한다는 계획으로 되어 있다. (출처 : 진실화해위)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득한 후 보안사로 전달되어 집행된 언론통폐합의 최종결재안인 「언론창달계획」. (1980. 11.) 언론통폐합을 자율결의 방식으로 하되 관계기관에서 배후 간여 · 조정하라고 되어 있고, 통폐합에 따른 잔무 처리를 계엄해제 전 완료하도록 되어 있다. (출처 : 진실화해위)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보도 통제는 더욱 심해져 기자들은 문화공보부에서 내려 보내는 ‘보도지침’에 따라 기사를 써야 했고 언론사 사주들은 전두환 정권을 떠받들기에 바빴다. 해직된 언론인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려면 정권과 사주의 애완견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블랙리스트’에 오른 해직 언론인들은 어느 언론사도 받아주지 않았다. 


언론 자유와 기자의 양심이 맷돌에 갈리듯 부스러지고 있던 1984년, 각 언론사에서 언론자유 수호 운동을 주도했던 해직기자들은 마침내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를 조직하게 된다. 신군부의 폭력과 탄압에 맞서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뜻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언론운동 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1980년 신군부의 손에 언론 현장에서 쫓겨난 젊은 기자들은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 활동과 함께 같은 해 12월에 깃발을 세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부터 이어져 온 언론자유 수호 운동은 유신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신군부의 가혹한 언론 탄압에 맞서 끝끝내 계속되어야 하는, 일종의 ‘사명’이 되었다. 많은 언론인들이 거리로 내몰렸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러한 고통의 역사, 내쫓김의 역사가 곧 한국의 언론운동사라고 해야 한다. 1984년에 만들어진 언협은 어떻게든 고통의 역사를 끝장내려는 이들이 뭉쳐 일궈낸 소중한 결실이자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언협이 출범하면서 한국 언론운동의 역사는 새로운 흐름으로 접어들게 된다.


“…기자들 중에는 산골의 행랑방에서 태어나 온갖 시련을 견디며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라는 사회적 신분에까지 상승한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은 생산 관계의 상층부에 위치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던 덕분에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지배층의 재생산을 위해 실시되는 교육을 받고 기자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에서 여러분들 대부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층의 의식구조를 갖게 되었다. …지금 우리들 주변에는 일인 독재의 시대를 청산하고 국민이 참다운 국민일 수 있는 민주사회를 실현하려는 진통이 시작되었다. 왜 우리들 기자가 학원과 노동조합과 정당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 터 곳곳으로 뛰어가 이러한 역사적 현장의 아픔을 자기해방을 위한 아픔으로 승화시키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


- 1980년 4월 8일 「헌법 개정과 언론자유」강연회 중 故 리영희 교수의 강연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