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모니터_
취약계층에만 ‘도덕적 해이’ 채근하는 가혹한 언론
등록 2017.08.01 19:51
조회 550

최종구 신임 금융위원장은 지난 26일 취임 첫 기자간담회에서 국민 행복기금, 금융 공공기관이 보유한 장기소액연체채권을 정리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닷새가 지난 31일, 금융위원회는 당초 계획을 구체화하여 국민행복기금과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멸시효 완성 채권 등 회수 불가능한 채권 약 21조7000억 원을 8월 말까지 소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더불어 대부업을 제외한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약 4조 원 가량의 소멸시효 완성 채권도 자율 소각하도록 유도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채권 추심에 시달려 온 214만 명이 금융 거래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는 등 재기의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부당한 채권 추심에 시달릴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경제활동 자체가 차단된 금융취약계층의 피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번 조치를 단행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최 위원장이 취임 직후 이 계획을 발표했을 때부터 ‘도덕적 해이’를 외쳤습니다. 31일, 첫 실행 계획이 공식화되자 이런 프레임이 재차 가동됐습니다.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문제’를 부른 ‘파격적 전액 면제’?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취임 일성에서 ‘장기‧소액 연체 채권’을 정리하겠다고 밝혔을 때부터 보수지와 경제지를 중심으로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너도 나도 빚을 안 갚고 버틸 것’이라는 겁니다. 중앙일보 <유례없는 100% 빚 탕감… ‘나도 버틸까’ 도덕적 해이 우려>(7/27 https://goo.gl/HEECdN)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당시에도 채무자들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무려 25년 동안 가혹한 추심을 감당하면서 정부의 탕감을 기다릴 것이라는 우려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31일, 금융위원회가 소멸시효완성 채권의 소멸을 선언하자 똑같은 프레임의 보도, 더 과장된 보도가 나왔습니다. TV조선이 단연 두드러집니다. TV조선은 이날 유일하게 2건의 보도를 할애했습니다. 2건 모두 초점은 ‘도덕적 해이’입니다. TV조선 <최대 214만 명 빚 26조 ‘탕감’>(7/31 https://bit.ly/2w0YGlx)에서 전원책 앵커는 아예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도덕적 해이 논란이 벌어집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역대 정부 최초의 전액 면제이자 최대 규모 탕감”을 단행했다면서 “지금까지 성실히 노력해 빚을 갚은 사람들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K-002.jpg

△ ‘소멸시효완성 채권 소각’에 ‘도덕적 해이’라 비판한 TV조선(7/31)
 

TV조선 <‘정권마다 되풀이’…‘도덕적 해이’ 논란>(7/31 https://bit.ly/2uQyGes)에서도 전 앵커는 “역대 문민 정권들은 대선 공약으로 으레 빚 탕감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집권한 뒤엔 채무자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빚을 깎아주는 채무 조정에 그치곤 했습니다. 전액 면제가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며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황민지 기자는 “개인 워크아웃을 확대”한 노무현 정부, “72만 명을 신용대사면”한 이명박 정부, “66만 명에 대해 채무조정을 실시”한 박근혜 정부 등 역대 정부의 ‘채무 조정’을 나열한 뒤, “모든 빚을 다 없애 주는 문재인 정부의 이번 정책은 사상 최대 감면 정책”이라 부각했습니다. 이렇게 역대 정부와 비교하며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사상 최대의 감면 정책’이라 강조한 이유는 결국 ‘도덕적 해이’라는 결론 때문입니다. 


TV조선은 “반복되는 부채 탕감 정책은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인식을 가져 올 수도 있”다며 “실제 지난 정부에서 채무조정을 받은 사람 5명 가운데 1명은 다시 채무불이행자로 전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고 “성실하게 빚을 갚는 사람과의 형평성 시비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채무 조정’만을 실시한 역대 정부의 정책에도 채무불이행자가 다시 발생했는데, 빚을 아예 소각하는 문재인 정부의 기조가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 시비’를 더 키운다는 겁니다.

 

공영방송도 똑같은 우려, 과연 그럴까?
이런 우려는 공영방송 KBS‧MBC에서도 나왔습니다. KBS <시효 지난 빚 탕감…123만 명 혜택>(7/31 https://bit.ly/2wggZTt)은 TV조선처럼 역대 정부의 사례까지 비교하며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고 “123만 명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재기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에 초점을 맞췄지만, 보도 말미에서는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이들과의 형평성 논란”을 덧붙였습니다. MBC는 지난 27일, <대규모 빚 탕감…도덕적 해이 논란>(7/27 https://bit.ly/2tP3blR)이라는 보도를 통해 “빚을 안 갚고 버티면 정부가 해결해 준다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고, 적은 돈이라도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채무자들과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습니다. 

 

법망의 그늘에 빠진 취약계층 보호하면 ‘도덕적 해이’라니…
과연 이런 비판은 정당할까요? 26일 금융위가 처음으로 ‘소액‧장기연체 채무 정리 방안’을 마련한다고 밝혔을 때부터 ‘도덕적 해이‧형평성 논란’ 비판이 나오자 금융위는 계획을 상당히 구체화했습니다. 31일 결정된 ‘소멸시효 완성 채권 소각’은 법적으로 갚을 의무가 사라졌거나 악성 채권 추심으로 변질된 채무로 대상을 구체화한 겁니다. 상법상 금융채권의 소멸시효는 5년으로 이 기간이 지나면 채무자는 빚을 갚을 의무가 없지만 금융사들은 그동안 법원의 지급명령을 통해 시효를 10년 단위로 연장하는 편법으로 채권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소멸시효가 완성되어도 채무자가 일부를 상환하면 전체 채권이 되살아나는 법을 악용해 채권자가 채무자에 일부 상환을 유도하는 사례가 많았고, 소멸시효가 완성되더라도 연체기록이 남기 때문에 채무자들은 신규 거래가 계속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 대부업체들이 금융사의 ‘죽은 채권’, 즉 소멸시효완성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연체 이자까지 붙여 추심을 하면서 사회문제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이렇게 법을 악용한 ‘악성 채권’부터 우선적으로 소각하여 취약계층을 보호하기로 한 겁니다. 정부의 이번 조치에 따라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전산 원장에는 ‘소멸시효 완성’이 아니라 ‘채무 없음’이 표기됩니다. 이는 TV조선이 말했듯 ‘채무자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빚을 일부만 변제했던 과거 정부의 정책과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그런데 TV조선은 ‘일부를 변제해줘도 5명 가운데 1명은 다시 채무를 불이행했으니, 완전 탕감해주면 도덕적 해이가 더 커질 것’이라 장담했죠.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법의 허점으로 인해 장기‧악성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빚을 갚으려 해도 늘어나는 이자와 상환기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채무의 일부를 변제해주거나 조정해주는 방식으로는 ‘빚의 굴레’를 끝내기 어려운 겁니다. TV조선이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정부는 좀 더 전향적인 방식을 택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KBS‧MBC‧TV조선은, 법을 몰라 10년이 넘게 빚 독촉에 시달리고 심지어 대부업체로부터 폭력적인 추심까지 감내해야 했던 취약계층을 향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며 채근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법률상 짧게는 10년, 길게는 25년 간 추심을 감당하면서 정부의 빚 탕감을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불과합니다.

 

‘죽은 채권’ 사고파는 건 ‘도덕적 해이’가 아닌가…언론의 시각부터 뜯어고쳐야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일부 언론에서 쏟아지는 비판을 감안한 듯 31일, ‘소멸시효완성 채권 소각’을 발표할 때도 구체적으로 반박을 달았습니다. 최 위원장은 “소멸시효 완성 채권 소각은 장기연체로 인해 제도권 금융에서 탈락하고 오랫동안 추심으로 고통 받으신 분들께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결코 단순한 '비용'이 아니며 '시혜(施惠)적 정책'도 아니다”라고 말했고 “포용적 금융은 금융소외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제고하고, 금융취약계층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우리 금융시스템이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등의 사회적 가치의 실현에 기여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요컨대 합법적 테두리에서 경제 성장의 동력인 경제활동 인구를 확보하고 채무자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국가의 당연한 임무이기도 합니다. KBS‧MBC‧TV조선은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면서도 그에 반박한 최 위원장의 반박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금융위원회가 이번 조치로 혜택을 주기로 한 취약계층의 사례는 매우 참담합니다. 노컷뉴스 <‘죽은’ 채권 소각하면 어떻게 되나>(7/31 https://bit.ly/2wgr3M3)에 따르면 “IMF 시절 장사가 어려워져 늘어난 빚과 생활고로 20년 가까이 힘들게 지내온 A씨”는 “일부 선납금만 납부하더라도 원금을 대폭 감면해준다”는 대부업체의 안내장을 받고 일부 선납금을 납부한 뒤 채무이행각서를 썼다가 가혹한 추심에 시달렸습니다. 이 대부업체는 소멸시효완성채권을 헐값에 매입한 뒤 채무자에게 일부 상환을 유도해 추심을 이어가는 ‘전문업체’였습니다. 법률지식이 없는 서민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겁니다. ‘대학생 C씨’의 경우 부친의 상당한 채무를 감당할 수 없어 수십만 원의 신청비용을 지불하며 상속 관련 ‘한정승인’을 받았지만, 알고 보니 부친의 채무는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상환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금융위원회가 구제키로 한 대상은 금융사와 대부업체의 부당한 행태에 고통 받는 서민들이지 ‘어떻게 해서든 빚을 갚지 않으려는 불한당’이 아닙니다. ‘도덕적 해이’를 논하자면 ‘죽은 채권’임을 알면서도 ‘소멸시효완성 채권’을 사고파는 금융사와 대부업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향해 ‘도덕적 해이’의 책임을 돌린 방송사들의 시각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7년 7월 31일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 JTBC <뉴스룸>(1,2부), TV조선 <종합뉴스9>, 채널A <종합뉴스>, MBN <뉴스8>

 

monitor_20170801_357.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