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호] [회원인터뷰] 내 친정은 민언련, 늘 언론운동이라 생각했다 (신미희 회원)
등록 2019.07.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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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희.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참여정부 청와대, 봉하마을, 노무현재단, YWCA. 그의 자리는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항상 언론개혁운동이라는 한 자리에 있었다.

 

언협을 시민단체로 확장하다

김언경 오늘 정말 반가운 분을 모셨습니다. 제가 처음 민언련을 ‘구경’왔을 때, 그때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언협이라고 불렀는데요. 아무튼 제가 언협에 처음 왔을 때 저의 첫 간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감개무량합니다. 먼저 본인 소개를 본인이 직접 해주시죠.

 

신미희 안녕하세요. 신미희입니다. 저는 91년부터 96년까지 민언련 전신인 ‘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간사로 일했고요. 이후 미디어오늘 기자, 오마이뉴스 기자를 거쳐서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미디어정책 행정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에는 함께 봉하마을로 내려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요. 서거하신 후에는 2015년 초까지 노무현재단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지난해 12월까지는 한국YWCA연합회에서 홍보협력관으로 활동을 했네요.

 

김언경 우와 이렇게 간단히 들어봐도 참 화려한 삶을 살았다 싶은데요?(웃음) 참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제 그 긴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보죠. 먼저 언협 이야기를 하면 제가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저와 남편은 살면서 만난 여러 시민단체 활동가 중에서 정말 딱 두명이 너무 훌륭하다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거든요. 그중 한명이 언협의 신미희 간사입니다. 그때 언협 간사들은 사실 모두 에너지가 넘치고 참 헌신적이었어요. 그냥 월급쟁이 직원 이런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언협에 간사로 들어오게 되었나요?

 

신미희 저는 대학 시절 교지를 만들면서 대학언론운동을 했어요. 제가 언협에 온 것은 91년이었는데요. 당시 우리 방송은 ‘땡전뉴스’ 시절을 못 벗어나고 있었고, 신문은 한겨레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보수신문 일색인 시절이었죠. 그리고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투쟁위원회와 80년 해직 당하신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까지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싸우다 쫓겨난 언론인들이 너무도 많았죠. 그때 함께 대학언론운동을 하던 친구들끼리 졸업 이후 언론사에 들어가기보다는 언론개혁운동을 하자, 언론개혁이 되지 않으면 우리사회가 제대로 갈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했고 그 활동공간으로 언협을 찾게 되었어요. 당시 언협의 가장 주요한 활동이 『말』지 발행과 해직언론인 복직투쟁 그리고 민족민주진영과 연대활동이었거든요. 언협에 와보니 아주 작은 사무실에 한분은 『말』지 출신 기획부장이었고, 상근 간사 한분 비상근 한 두분이 일하고 있었어요. 비슷한 시기에 언협의 상근 또는 비상근 간사로 활동하게 된 동기들(이진숙 현 민언련 이사, 조진경 전 언협 간사, 노영란 현 매비우스 사무국장)은 시민의 힘으로 언론민주화운동을 해보자는 의견을 냈어요, 그래서 『말』지 사무실과 약간 떨어진 곳에 별도의 언협 사무‧교육공간을 만들고, 언론학교와 시민 모니터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언론학교도 잘 되고, 선거보도감시연대도 잘 되고, 그 이후 신문모니터분과와 방송모니터분과 등이 매우 활발하게 잘 돌아가서, 간사들이나 회원들이나 모두 신이나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언경 맞아요. 저도 그 시절,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회원 활동했던 추억이 늘 잊히지가 않아요. 당시 언협의 분위기는 뭐랄까. 독립운동을 하는 기분? 모두들 울분에 차있으면서도 들떠있었고, 뭔가 하는 재미가 제대로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런 언협이 지금의 민언련으로 성장했는데요. 신미희 씨에게 언협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금 민언련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때요?

 

신미희 민언련은 지금 제 인생의 뿌리가 된 것 같아요. 민언련 이후 저의 모든 삶과 일은 언론운동의 연장선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딜 선택하든 이게 언론운동에서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어요. 시민의 힘으로 이루는 민주화운동, 시민의 힘으로 언론을 바로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언협에서 단단히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게 가장 큰 자산 아니었을까 생각하고요.

어딜 가서든 제 친정은 언협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게다가 언협이 지금 너무 잘됐잖아요(웃음). 그때 우리는 참 열심히 일했지만 사실 크지 않은 단체였어요. 기자들은 그나마 언협을 좀 알았지만, 일반 시민단체에서도 잘 몰랐고, 시민들은 정말 그런 단체가 있는지 잘 몰랐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언협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온 많은 분들께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제가 언협 출신이라는 게 진심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언론운동 활동가에서 미디어 전문 기자로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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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경 저도 아이 낳고 키우며 언협 회원 활동을 접었는데요. 우연히 미희 씨를 만났는데 미디어오늘 기자생활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미희 씨가 계속 언협에 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뭔가 생기있게 또 다른 삶을 개척한다 싶었어요. 특히 오마이뉴스에 있을 때는 굉장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기사들이 펑펑 나와서, “요즘 우리 미희 씨 잘나가네” 이렇게 혼자 축하하기도 했는데요. 기자로 활동했던 시기는 어땠어요?

 

신미희 저는 당시 미디어 전문기자였어요. 언협 활동을 기반으로 언론 내부와 외부를 두루 볼 수 있어서 전업기자와는 또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었어요. 이것이 기자로서 큰 도움이 됐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줬어요.

미디어오늘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당시 새로운 대안미디어로 주목받고 있는 오마이뉴스로 옮겼는데, 오마이뉴스에서는 미디어분야만 전담한 게 아니라 사회부장 직책까지 맡게 됐어요.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특종도 많이 했죠. 민언련 시절부터 독자와 시청자 관점으로 뉴스를 보는 게 훈련이 되어 있다 보니, 소스를 픽업하고 취재원 협조를 더욱 잘 받을 수 있던 게 처장님이 말씀하신 주목받는 기사들을 쓰는 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잊을 수 없는 특종 중에 조선일보 기자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 있는데요, 그 콧대 높던 조선일보가 사과도 하고, 해당 기자도 정직처분을 받고, 마침 그 기자가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사건의 파장이 더 커졌어요. 그때 ‘아, 이렇게 뉴스 하나가 세상을 좀 바꿀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고, 사회부 영역으로 취재활동을 넓히는 계기가 됐는데요. ‘자전거일보’ ‘비데신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대 신문사의 불법·탈법 경품 문제가 심각했는데 혼탁한 신문시장을 고발하는 기사 등을 눈여겨본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게 되죠.

 

말 많고 탈 많았던 청와대행과 ‘어공’의 좌충우돌 언론개혁 활동기

김언경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청와대로 넘어가네요. 어쩌다 청와대로 가게 되었나요? 누구한테 전화 받았어요?(웃음)

 

신미희 언협과 노무현 대통령은 인연이 좀 있었지요. 언론학교에 ‘정치와 언론’이라는 특강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치인 중에 깊이 있게 언론문제에 천착하거나 언론개혁 관점을 가진 정치인을 찾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 길을 열어주신 게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이었어요. 노 전 의원은 언론학교의 1박2일 캠프에 와서 특강도 해주셨고, 언론학교 일일호프에도 와주셨죠. 이때마다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요. 나중에 그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고요. 그런 분이 대통령으로 있는 청와대에서 미디어정책 담당 행정관이란 제의를 받은 것은 사실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쓰는 것마다 의미 있는 기사가 되고 특종도 자주 하는, 그야말로 기자로서 전성기였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기자생활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과, 다시는 언론개혁 과제를 주요 정책으로 삼을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사이에서 많이 갈등했어요. 그렇게 2개월 째 청와대 요구를 거절하던 어느 날, 마지막으로 확실히 거절하려고 나간 자리에서 정말 뭐에 홀렸는지 제가 ‘네’라고 대답하고 만 거에요.(웃음)

 

김언경 당시에도 기자가 바로 청와대로 간다는 것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텐데요.

 

신미희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날이었는데요. 오마이뉴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이 이야기를 선·후배 기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나 앞이 캄캄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정치권으로 직행하는 조중동 기자들을 가장 먼저 앞장서 비판하던 기자였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이걸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들이 스치면서 정말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어요. 실제로 오마이뉴스를 떠날 때, 박수 받으면서 떠나진 못했어요.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개혁 의지가 많이 알려져서 오해도 다소 풀렸지만요. 사실 당시 받은 인간적인 아픔은 있었어요.

 

김언경 청와대에 가니 좋았어요? 일하기가 어땠어요?

 

신미희 처음엔 힘들더라고요. 저는 뜻을 품고 갔는데, 행정조직에서 마주친 현실은 너무 달랐어요. 참여정부 사람들은 모두는 아니더라도 언론문제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노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분만이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낙심을 했어요. 하지만 신문유통원 예산확보 등 과제를 해결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서서히 일하는 재미도 느끼고, ‘여기서 할 일이 있겠구나’라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죠.

 

‘인간 노무현’과 함께 했던 시간

김언경 저는 미희씨가 청와대 있을 때는 연락을 안했어요. 그땐 뭔가 안부 전화를 하는 것조차 뭔가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죠. 그런데 어느날 미희씨 청첩장이 왔는데 바로 봉하에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언협 친구들이 우르르 같이 내려갔었죠. 아 참 그때 날도 좋고 봉하에서 한 결혼식 참 정겹고 좋았어요.

 

신미희 맞아요. 봉하로 내려가서 거기서 결혼도 했죠.

 

김언경 청와대 이후 어쩌다 또 봉하까지 따라가시게 되었는지 사연도 못들어봤어요.

 

신미희 참여정부 말기 다들 정권재창출이 어렵다고 말하던 즈음 노 대통령께서 ‘나는 퇴임하면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가서 주민들과 생태농업을 하면서 시민문화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일부 참모들에게 “다른 일을 할 사람은 자유롭게 직장 알아 봐도 좋지만, 함께할 뜻이 있는 사람들은 같이 준비해보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저는 바로 다음 날 ‘같이 하겠다’고 했어요. 원래는 대통령은 퇴임 이후 봉하로 곧장 가시고, 봉하가 좀 정리되는 동안에 우리는 서울에서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구상과 연구과제를 책으로 내는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봉하마을에 예상 못한 수준의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신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방문객이 많아져서 애초 계획을 미루게 되었어요.

하필 제가 이 시기에 서울에서 잠깐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야당의원의 국정감사를 서포트해주는 일을 했거든요. 봉하에서는 대통령의 생태농업 추진과 시민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봉하일기’로 정리하는 일이 시급하니 빨리 내려오라고 하고 있었고요. 의원실에서 봉하로 내려가기보다 언론개혁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일을 국회에서 해보자고 제안해서 또 흔들렸죠. 그때 노 대통령을 만났는데요. 항상 부드럽게 이야기하시던 분이 이날은 좀 그렇지 않았어요. “미희 씨는 무엇을 하고 싶냐”고 단호하게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대통령이 하시는 시민문화운동을 같이 하고 싶다는 뜻은 변화 없다. 그런데 국정감사 두달을 서포트 하다보니 미디어정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지금 언론문제가 심각하다. 봉하일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띄엄띄엄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노 대통령께서 “그것도 일리있는 말이다” 이러시더니 “미희 씨 내가 말하는 시민문화운동의 핵심이 뭔지 알아요? 언론운동이에요. 내가 언론개혁운동이니 언론운동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언론이 그것만 집중해서 지적할 테니 에둘러 시민문화운동이라고 한 것이에요.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언론운동이고, 미희 씨가 하고 싶은 것도 언론운동인 거네요. 국회는 또 다른 적임자가 있을 테니 내려와서 함께 준비합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저는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바로 짐 싸가지고 봉하로 갔어요. 그렇게 봉하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김언경 그렇군요. 노무현 대통령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신미희 그렇게 봉하로 내려가서 봉하일기를 맡고 여러가지를 준비하던 와중에 ‘박연차 게이트’가 불거졌어요. 검찰의 표적수사 강도가 높아지다 보니 원래 계획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고향에서 농부로 살고자 했던 대통령의 소박한 꿈도 깨졌고요. 결국 방문객 맞이하는 것도 포기했고, 노무현 대통령께선 ‘나와 얽히면 사돈의 팔촌까지 세무조사 받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압받으니 아예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하실 정도였죠.

이렇게 대통령께서 어떤 외부활동도 할 수 없게 되면서 뒤로 미뤄뒀던 ‘민주주의, 진보주의’ 연구와 책 출간 계획을 앞당겨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가칭 ‘진보주의 연구모임’을 만들어서 2008년 12월부터 2009년 5월까지 거의 매일 몇 시간씩 토론하고 연구하고 그런 시간을 보냈어요. 노대통령과 윤태영 전 비서관, 양정철 전 비서관, 지금 경남지사인 김경수 비서관, ‘노마아빠’ 이송평 정치학 박사, 그리고 제가 집필팀으로 함께했어요.

그런데 서거 나흘 전인 5월 19일, 대통령께서 ‘진보주의 연구모임’ 회의를 하자고 하셨어요. 이날 집필팀 해체가 논의됐는데 대통령이 “그러자. 그동안 고생많았다”면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책의 출간 계획을 미루고, 이 모임도 오늘까지 하고 좀 흩어지자고 하셨죠. 저는 사실 그 말을 듣는 그 날도 대통령께서 그런 선택을 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얼마 전에도 ‘연구가 잘 돼야 내가 자네들하고 계속 만나면서 그나마 이 작은 끈이라도 이어가지. 안 그러면 이 적막강산에 내가 쓸쓸해서 무슨 낙이 있겠는가’라고 쓸쓸한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었거든요. 집필팀에서는 막내였던 제가 회의내용을 기록, 정리하곤 했는데, 그날은 글이 써지지도 않고 노트북 자판 위로 눈물만 뚝뚝 떨어졌어요.

 

그리고 “미희씨가 미디어 쪽을 잘 아니 요즘 한겨레나 경향신문은 경영이 어떻드냐, 오마이뉴스나 미디어오늘은 광고나 경영은 어떻드냐” 이렇게 물으시는 거에요. 그때 이미 저는 진보언론에 크게 실망하고 배신감이 컸는데, 대통령은 끝까지 그렇게 진보언론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놓지 않으신 거에요. 그리고 평소 말씀 중 잊혀지지 않는 것은 ‘내가 대통령으로서 많이 관심을 갖고 언론지원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결국 언론은 언론 스스로가 지켜나가는 거고 시민들이 언론에 얼마나 뜻을 같이하고 지켜주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에요.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끝까지 언론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놓지 않으신 거예요. 마지막 가시면서까지.

그 날 한사람 한사람에게 ‘어찌 먹고 살 건가’를 물어보시던 대통령이 모임을 마치곤 다른 때보다 유독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고 내실로 들어가는 손잡이를 잡은 채 다시 뒤를 돌아보며 우리 눈길을 맞추던 모습, 그게 마지막으로 뵈었던 모습이에요.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분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나 특히 언론개혁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있게 고민했는지를 그때도 잘 몰랐지 않았나 싶어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시간은 언론개혁운동이 제가 꼭 해야 될 사명이자 제가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해준 시간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과제, 시민 중심의 언론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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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경 너무 맘이 아파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미희씨가 부럽기도 하네요. 누구도 갖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가진 것이니까요. 대통령 서거 이후 미희씨는 노무현재단에서 활동하셨어요. 요즘 노무현재단은 여러 측면에서 언론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어떻게 보세요?

 

신미희 저는 노무현재단이 노무현의 죽음과 피 위에 세워진 조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분이 생전에 시민들과 같이 하시고자 했던 시민문화운동, 언론개혁운동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해나가는 것, 그것이 정말 그 분의 정신과 뜻을 계승해 그 분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분이 이루고자 했던 시민 중심의 운동은 언론개혁이 당연히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창덕궁 근처에 노무현센터를 짓고 있는데, 그 센터가 시민들이 언제든 찾아오고 활동할 수 있는 거점으로 많이 활용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한 말씀 덧붙이자면, 올해 10주기라고 거의 모든 언론이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고 뜻을 조명하는 기사를 내놓았어요. 감사해요. 하지만 그게 진정한 추모가 되려면, 정말 좀 사과와 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희망을 갖는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매체와 기자들부터 한번쯤은 그런 진지한 고백과 성찰, 반성이 나오길 바랍니다. 그런 노력이 우리 언론에 대한 희망이 될 것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야 그들과 함께 개혁을 꿈꿀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언경 긴 시간 고마워요. 모처럼 긴 시간동안 회포를 푼 기분이에요. 그리고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신미희 저는 요즘 민언련이 언론운동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민언련이 한결같이 언론운동의 맥을 지켜왔기 때문이고요. 그 노력이 지금의 바뀐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진 것이죠. 민언련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여하는 역할은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요. 우리 후배 활동가 분들이 그 자부심과 자긍심은 충분하게 느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서 존경스럽고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어딜 가든 ‘민언련 출신’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민언련이 이 활동을 계속 지금처럼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언경 그나저나 앞으로 민언련에 자주 좀 나오세요. 뭔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친정이니까요.

 

신미희 저도 민언련 회원으로서 어떻게든 함께 활동하고 싶었지만, 청와대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여기 나타나는 게 누가 될까봐 조심하고 있었어요. 오늘 민언련이 저를 소식지 인터뷰에 초대해준 것만으로도 정말 기분이 좋고 고마워요. 제 여러 경험이 민언련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 민언련과 함께 하고 싶어요.

 

인터뷰_김언경 사무처장, 정리_공시형 활동가, 사진_고은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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