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영화이야기]내가 뽑은 “2019년 상반기 개봉 영화 베스트 5”(김현식)
등록 2019.07.1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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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아일랜드․영국․미국,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2위. 콜드워 (폴란드,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

3위. 시인 할매 (한국, 감독: 이종은)

4위. 레토 (러시아․프랑스,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5위. 알리타: 배틀 엔젤 (미국․아르헨티나,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올해 상반기 가장 인상에 남은 영화 5편이다. 1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연출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다. 2015년《더 랍스터》에서 사람 심리 묘사를 풀었던 감독은 왕과 왕을 둘러싼 욕망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그렸다. 《콜드워》는 냉전을 초월한 완전한 사랑 이야기이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여전히 모호하다. “사랑을 하려거든 돌처럼 심장이 식어야 한다”는 영화 속 노랫말이 맴돈다.

《시인 할매》에서 글이 전하는 진심을 새삼 깨달았다. 구소련 시절 록 음악 선구자였던 ‘빅토르 최’가 보낸 가장 찬란한 여름을 담은 《레토》는 쓸쓸한 여운이 오래간다. 《알리타: 배틀 엔젤》이 창조한 26세기 세상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그럴싸하다. 2편을 기대한다.

 

 

다섯 편 중 1위와 3위 영화를 소개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아일랜드․영국․미국,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 출연: 올리비아 콜맨•엠마 스톤•레이첼 와이즈•니콜라스 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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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여왕 앤(올리비아 콜먼)은 명목뿐인 절대 권력이다. 그 곁에는 무기력하고 히스테릭한 왕을 대신해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비선 실세 공작부인 사라(레이첼 바이스)가 있다. 때로는 합리적 이성으로, 때론 사랑이란 초밀착 결탁으로 앤을 길들여, 주종 관계가 헷갈리기도 한다.

몰락한 귀족 출신 하녀 애비게일(엠마 스톤)은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앤 옆자리를 지킨 사라를 밀어내고 신분 상승을 이루기 위해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The Favourite = 가장 선호하는 사람, 우승 후보.

과연 여왕이 선택한 최후 승자는 누구일까.

앤은 둘 중 누구에게 진심을 줄까.

 

 

안타깝게도 '더 페이버릿' 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사라와 애비게일이 몸부림치며 권력 쟁탈전을 벌여도 결과는 허무할 뿐이다. 두 사람이 꾸민 계획이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여왕 앤 앞에선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지독한 변심이 장악하고 변화무쌍한 앤 마음은 사라와 애비게일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남들 보기에 앤이 무기력과 히스테릭만 남은 여왕일지라도 그는 본능적으로 '최대 권력'을 지니고 있다.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자기 주위에서 사라와 애비게일이 벌이는 접전이 나쁘지 않다. 진심이든 모략이든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만이니까.

 

 

앤 여왕의 '텅 빈 눈'을 봤다. 사람도 사랑도 결국 내 안에 머무르지 않는 절대 고독이 스몄다.

"나는 지금 너무나 고독해요." 말할 수 없는 처지가 안쓰럽다.

 

 

엔딩 크레딧을 따라 엘튼 존이 부른 오리지널 버전《Skyline Pigeon》이 흐른다.

이 곡은 피아노 연주 버전이 유명하다. 1969년 데뷔 앨범 {Empty Sky}엔 바로크 시대 성행했던 화음 반주용 건반 악기 하프코시드 연주 버전이 실렸다. 훗날 피아노로 리메이크했다.

50년 전 발표한 노래가 50년 후 세상에 나올 노래인 양 아득하다.

 

 

시인 할매 (한국, 감독: 이종은 / 출연: 김막동•김점순•박점례•안기임•윤금순•양양금•최영자•김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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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하고 5분 만에 눈물이 났다.

할머니 한 분이 그린 '상여' 때문이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상여엔 친정엄마가 잠들었다. 왜 상여를 그리셨을까.

할머니는 돌아가신 어머니 상여를 따라가지 못했다.

젖먹이가 내내 울고 보채느라 어쩔 수 없었다. 한글을 배우고 비로소 무언가 쓸 줄 안 후, 그때 어머니 이승 떠나는 길을 배웅하지 못해 애통한 심정을 시로 썼다.

사모님(한글 선생님)이 시를 읽고,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시라 독려했다. 당신은 나이 팔십에 엄마와 진짜 이별했다.

 

 

영화 소재는 이미 TV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봤던 이야기다. 눈물을 쏟은 이유는 뭘까.

전남 곡성군 서봉마을에 사는 72세부터 84세 할머니 일곱 명이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 시작은 2009년, 마을에 <길 작은 도서관>을 연 김선자씨였다. 도서관 정리하는 걸 도와주러 온 마을 할머니가 책을 거꾸로 꽂는 걸 보고 결심했다.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자.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 할머니들 일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앉으나 서나 자식 생각, 자식 걱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밭으로 어디로 일을 다닌다.

고단했던 삶. 청춘 시절이, 아이들 키웠던 시절이 요즘만 같다면, 아이들을 더 잘 먹이고 입혀 '높은 핵교'에도 보냈을 텐데. 한글을 알았다면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숙제 내밀며 도와달라고 했을 때 어떻게든 알려주고, 글씨 모른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할머니들은 부모님에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시에 담았다.

평생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늙어버린 나에게도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50석 조금 넘는 작은 상영관. 나와 같은 줄에 앉은 오십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소리 내 흐느껴 울었다. 영화 끝나고 나오는 길 남자는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네." 몇 번이나 읊조렸다.

 

 

할머니들 시는 2016년 시집《시집살이 詩집살이》, 2017년 시화집 《눈이 사뿐사뿐 오네》로 세상에 나왔다. 사모님(선생님) 김선자씨 진심이 통했다.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한지 새삼 깨달았다. 진심을 담는다면 미사여구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글 김현식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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