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영화이야기] "조각배", 프란시스 레이
등록 2019.01.2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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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멜로디나 가사에 꽂혀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 노래가 아니라, 10년 만에 20년 만에 불쑥 등장한 노래. 이들도 한때는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동안 어디에 머물다 나타났을까.

노래는 지식과 달리 마음이 기억하는 순간이다. 대게 위안을 주던 일이라 쉽사리 잊지 않을 거 같은데, 막상 죄다 놓치거나 위안했던 일조차 그러려니 한다. 느슨하고 인정머리 없는 마음을 탓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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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동 ‘얽히고설켜 막혀버린 恨’

한 20년 만에 ‘조각배’가 등장했다. 이 노래는 국악 작곡가이자 대금 연주가 김영동 작곡집 <어디로 갈꺼나>(1982년)에 실렸다. 이동철 작사, 김영동 작곡, 이현옥이 노래했다.

원래는 1982년 개봉한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주제가로, 이동철(13대 국회의원 이철용 필명)이 원작 소설을 썼다. 갓 서른 살, 이장호 영화 조감독을 거친 배창호 감독이 첫 번째로 연출한 영화다.

첫 남편 주석(김희라)와 헤어지고 태섭(안성기)와 재혼한 명숙(김보연)은 고달픈 날들을 보내며 산다. 숨어 지내야 하는 태섭 대신 생계를 꾸리며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려고 애쓴다. 과거를 알 수 없던 태섭은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닌 범죄자였다. 그런 태섭을 감싸 안은 명숙, 운명은 야멸차게 둘을 갈라놓았다. 구속된 태섭을 면회한 명숙이 말한다.

 

“이제 (면회) 못 올깁니다.”

“더이상 참지 못하겠심니더.”

“사랑합니더. 전 너무 지쳤어예.”

 

분홍색 포대기로 아이를 등에 업고 어디론가 떠나는 명숙이 한없이 흐느끼며 우는 흙길에 ‘조각배’가 흐른다. 누가 명숙을 위로하고 보듬을 수 있을까.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주저앉은 그 삶은 ‘팔자가 기구하다’ 정도론 부족하다. 계절은 이제 막 여름 입구인데, 노래에 얽힌 사연이 처연해 무척 차갑고 쓸쓸 하다. 영화에선 가수로도 활동했던 김보연이 직접 불렀다.
 

성난 물결 파도위에 가냘픈 조각배

이내 설운 몸을 싣고 하염없이 가는 여인아

 

봄바람 꽃바람 속삭임도 역겨워

깊숙한 늪으로 덧없이 갈껀가요

 

소낙비 쏟아지는 깊은 밤 갈대 숲

기약 없는 인생 항로 정처 없이 가는 여인아


달님이 잠깨어 방긋 웃음 역겨워

운명에 몸을 싣고 덧없이 갈껀가요

 

같은 음반에서 잘 알려진 곡은 ‘어디로 갈꺼나’이다. 김영동이 직접 부른 이 노래는 이장호 감독 《어둠의 자식들》(1981년) 주제가다. 두 노래 모두 마음이 얽히고설켜 막혀버린 한 恨을 담았다. 대금 연주곡 ‘삼포 가는 길’도 애틋하긴 매한가지다. 이 곡은 황석영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KBS 《TV문학관-삼포 가는 길》(1981년) 삽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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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레이 ‘마음을 연결하는 섬세함’

20세기 3대 영화음악가 ‘프란시스 레이’가 2018년 11월 7일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혹시 이름은 생소하더라도 그가 작곡한 OST는 알게 모르게, 오며 가며 들어서 친숙하다.

1970년 아서 힐러 감독이 연출한《러브 스토리》 OST가 대표작이다. 주인공 제니(알리 맥글로우)와 올리버(라이언 오닐)가 함박눈이 쌓인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눈싸움할 때 흐르던 음악 ‘Snow Frolic’은 해마다 겨울이면 한두 번은 분명 들을 수 있다.

1987년 MBC FM <FM 영화음악> 연말 특집 ‘청취자가 뽑은 영화음악 베스트 100’에서 《러브스토리》 OST는 《로미오와 줄리엣》 ‘A Time for us’, 《라스트 콘서트》 ‘Adagio Concerto’를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1999년 KBS 2FM ‘김광한의 추억의 골든팝스’가 선정한 차트에선 ‘Theme From Love Story’가 3위에 올랐다. 1위는 《타이타닉》 ‘My heart will go on’, 2위는 《시네마 천국》 ‘Love Theme’였다. 2015년 KBS <연예가 중계>에서 선정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영화음악 100’ 8위에 올랐다.

20세기 3대 영화음악가는 보통 니노 로타 *대표작_ 《길》, 《대부》 시리즈, 《태양은 가득히》, 엔니오 모리코네 *대표작_《미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프란시스 레이를 꼽는다. 세 사람 중 ‘프란시스 레이’를 가장 좋아한다. 사람 마음을 읽는 데 탁월하다. 그는 작곡한 노래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1975년 영화 《엠마뉴엘2》 주제곡 ‘L'amour D'aimer’를 주인공 실비아 크리스텔과 듀엣으로 불렀다. 프랑스 감독 클로드 를루슈가 1981년 연출한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선 릴리안 데이비스와 ‘추억을 위한 발 라드 Ballade Pour Ma Memoire’를 불렀다.

프란시스 레이는 《러브스토리》보다 4년 앞서, 1966년에 개봉했던 프랑스 영화 《남과 여》 OST를 작곡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이하게 피아노 대신 바로크 시대 성행했던 화음반주용 건반 악기 쳄발로 (하프시코드)를 사용했다.
개인적으론 1968년 제10회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 올림픽 다큐멘터리《하얀 연인들》 OST를 좋아한다. 제목만 보면 멜로영화 같지만, 프란시스와 여러차례 협업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연출한 기록영화다. 원제는 《13 Jours En France, 프랑스에서의 13일》이다. 일본 개봉 제목 《白い恋人たち》을 그대로 따온 결과다. 2002년 KBS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다. 1970년 5월 29일부터 3주 동안 서울 <피카디리> 극장에서 상영했다.

같은 해 개봉한 미셸 브와롱 감독 《개인교수 La leçon particulière》OST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상 여인을 사랑하는 10대 후반 남학생이 겪는 쓸쓸한 첫사랑 이야기, 알랭 들롱 아내였던 나탈리 들롱이 연상 여인으로 열연했다. 니콜 그로와질이 부른 주제곡 ‘Where did our summers go?’가 애틋하다.

프란시스 레이. 그를 추억하며 영화 《빌리티스》 (1977년) 메인 테마 ‘Bilitis’를 반복 재생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마음을 이토록 섬세하게 그린 음악이 또 있을까.

 

김현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