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호] [영화이야기] 우리가 버린 아이들, 살인의 밤: 『기억의 밤』
등록 2018.10.0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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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버린 아이들, 살인의 밤: 영화 『기억의 밤』

(개봉 2017년, 한국, 감독: 장항준 / 출연: 강하늘, 김무열)

1997년 11월 어느 비오는 날 밤, 평범한 가정집에서 모녀가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가장은 다음 날 새벽 자신의 근무지 병원 건물의 옥상에서 실족사하고, 다섯 살 난 사내아이만 살아남는다.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고 목격자도 없던 탓에 범인은 잡히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더 이상 공권력에 기댈 수 없게 된 유족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살인범을 추적한다. 최사장(김무열)으로 불리는 청부폭력범이 유족으로부터 사건을 의뢰 받아 수사를 진행하는데, 20년 전에 교통사고로 고아가 된 당시 나이 스물 한 살의 송진석(강하늘)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해리성 기억상실이다”

자백하라고 가해지는 지독한 폭행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완강히 버티는 진석을 최사장은 최면수사관으로 퇴직한 박선생(문성근)에게 보인다.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기억에서 지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죄를 자백하게 하려고 최사장과 박선생은 진석에게 최면요법을 시행하기로 한다. 그들은 그의 기억을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시간으로 되돌린 후, 살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과 같은 공간, 같은 분위기를 진석에게 제공한다면 진석이 ‘그날 밤의 기억’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최사장은 진석의 형 역할을 맡고, 박선생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역할을 할 여인(나영희)을 물색하여 가짜 가족을 만들었다. 최면 암시를 통해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진석이 행복했던 시간, 스물 한 살의 3수생이던 1997년 5월, 온 가족이 이사 들어갈 새집으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 시점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만성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다는 거짓 기억을 첨가해서. 이사를 마친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유석(김무열)은 바람을 쐬자며 진석을 밖으로 유인한다. 살인 현장을 완벽히 복원한 후 진석을 다시 집으로 불러 들여 보여줄 유석의 계산은 갑자기 나타난 형사들에게 잡혀가면서 무산된다. 그는 청부폭력 및 사기 혐의로 수배 중이었던 것이다. 19일 만에야 겨우 겨우 빽과 돈을 써서 경찰에서 풀려나왔으나, 당분간은 비소식이 없어 20년 전 살인이 일어나던 밤을 재현할 수가 없다. 진석에게는 납치당했던 형이 돌아 온 후에 왼쪽 대신 오른쪽 다리를 절거나,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잠들었을 때 샤프 심으로 눈을 찌르려 하는 등 이상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다 신경쇠약증 약을 정확히 챙겨먹지 않아서 헛것이 보이는 거란다. 밤에 몰래 외출하는 형을 미행하면서 형이 다리를 전혀 절지 않고 게다가 폭력배였다는 것을 목격하지만, 그 마저도 환각으로 몰린다. 어머니에게 형이 형이 아닌 것 같다고 속을 터놓지만,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마저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경찰서로 도망친다. 가짜가 가족 행세를 하면서 자신을 가두었다고 폭로하지만 오히려 현재가 1997년이 아니라 2017년이며 자신은 40세가 넘은 아저씨라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거울이 등장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의 기억과 실제의 괴리를 인지한다.

유석에게 따지려고 비가 내리는 밤 경찰서에서 집으로 돌아갔을 때 20년 전 살인 사건의 현장이 재현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진석의 기억은 살아나지 않는다. 죽이려는 유석으로부터 쫒기는 중에 진석은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그 외상으로 인해 마침내 진석의 기억의 문이 열린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청부한 사람이 자신의 형을 치료하던 주치의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내를 죽이라고 했던 것에 분노해서 의사를 찾아가 따졌던 것 등 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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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억의 밤』(2017, 장항준)이 공포를 주는 지점은 미스터리스릴러물 장르 공식을 따르면서 곳곳에 배치한 ‘놀람’의 순간이 아니라, 안전망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국민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현실 인식’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 없는 국가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사만큼 지독한 공포가 있을까.

1997년의 기억에서 지워진 살인의 밤은 두 개의 비극에서 시작했고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한다. 그 의사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IMF 경제 위기로 무일푼이 되게 되자 아이들을 거리에 나앉지 않게 할 돈이 필요하자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청부살해하는 나쁜 선택을 한 다. 한편, 역시 단란한 중산층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밝고 순수하게 자란 청년 진석은 교통사고로 졸지에 부모를 잃고, 6개월째 의식없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형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형을 살리려면 거액의 수술비를 그가 마련해야 하는데, IMF 경제 위기로 구직난 속에서 고졸 학력의 그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다. 장기이식 까지 알아보고 다니지만 여의치 않던 차에, 온라인 구인구직 방에서 은밀히 청부살인 제의가 들어온다. 그 제안을 받는 일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이 두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했는데, 살인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섯 살 먹은 아이는 보육원에 버려졌고 그곳에서 자라나 청부폭력범 최사장이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청부 살해한 이가 아버지였다는 진실에 맞닥뜨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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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가족이잖아요... 가족인데 어떻게 죽이라고 시켜요?”

“너는? 너도 니 형을 살리려고 남을 죽이겠다고 했잖아. 나도 내 새끼 살리려고 아내를 죽여달라고 한거야. 뭐가 달라?”

흔히 인간은 극한 상황에 처하면 생존을 위한 배제를 행하게 되고, 그때 타자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게 가까운 방향으로 순서를 잡는다. 핏줄을 경계로 나와 타자를 나누고 타자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다. 사회를 안전하게 지속시키려면 그러한 극한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 국가와 이웃이 할 일이다. 『기억의 밤』은 IMF 경제 위기에 내몰린 이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를 따끔하게 질문하고 그 비극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메시지도 놓치지 않는다.

염찬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