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호] [책이야기] 이 이야기를 끝낼 사람은 누구인가
등록 2018.05.0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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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단한 능력을 갖춘 생물이다. 그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없는 두뇌, 깊이를 알 수 없는 정신력, 거기다 다른 존재와의 교감력까지. 그런데도 인간은 아주 단순한 한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상대가 싫다고 말할 때 자신이 그에게 하려 했던 행동을 멈추는 것. 왜 그게 그토록 어려운 걸까. 그것만 잘 할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을까. 소설 같은 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탄생했고 우리가 드러내놓고 말하기 꺼리며 묻어둔 것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오랫동안 합의해온 평화에 균열을 낸다. 강화길의 <다른 사람>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다른 사람, 적어도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이 될 거야!
 
“그는 내 직장 상사였고, 그건 다섯 번째 폭행이었다. 그날 나는 그를 신고했다.”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데이트 상대에게 폭행을 당한 진아는 그 사실을 인터넷의 한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고, 그 내용이 트위터로 여기저기 퍼날라지면서 수많은 댓글이 붙는다. 그리고 그중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 문장이 진아의 눈을 뚫고 들어와 마음에 박힌다.

“김진아는 거짓말쟁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년. @qw1234”

진아는 ‘거짓말’과 ‘진공청소기’, 이 두 낱말을 한 문장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고향으로 내려간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잘 수 있는 쉬운 여자, 그래서 ‘진공청소기’라고 불렸던 대학 동기 하유리, “나 좀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그녀를 외면하고 돌아섰던 그날의 골목길,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진아를 과거로 이끈 건 하유리에 대한 석연치 않은 기억이었지만 그녀의 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과거로 묻어두고 싶었던 이들이 줄줄이 엮여 현재로 되살아나온다. 어릴 적 비밀친구였다가 대학 때 진아의 짝사랑을 낚아채가버린 양수진, 진아를 비롯해 모두가 흠모했던 선배 류현규, 사랑을 잃은 공허를 메우려 잠시 사귀다 헤어진 동기 김동희, 자신의 출세와 관련된 것 외에는 모든 일에 냉소적이었던 여교수 이강현.... 결국 진아가 마주한 진실은 수진도, 유리도 성폭력에 읽혀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어둠 속에 가둬버렸다는 것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위중한 성병 진단을 받고, 아프다고, 싫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여자를 지속해서 강간하고도 ‘나는 그 여자와 사귄 적이 없다’고 믿는 남자,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여자를 강간하고 나서 ‘나는 우리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잊자. 술이 죄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는 학내 성추행사건에 휘말리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뇐다. “내 이전 여자친구들에게 물어보라,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동의 없이 뭔가를 저지른 적이 있”는지를. 그는 지식인답게 명확하게 구분지을 줄도 안다. “사람들은 남자의 폭력성에 대해서만 떠들지만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폭력성의 이면에 두 사람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라고. 얼마나 논리적으로 들리는 말인가. ‘두 사람의 문제’가 있으면 폭력과 강간은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거냐고 되묻기 전까지는.

남자의 폭력으로부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그녀들은 결심한다.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상처받지 않고 겁먹지 않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
 
사회여, 이 문제를 논쟁하라
 
강화길의 화법은 직설적이다. 부드럽게 순화하거나 세련되게 우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분명하게 전한다. 데이트 폭력에 대해, 강간에 대해, 이기적인 거짓말과 비겁한 회피에 대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진물이 흐르는 상처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해, 각 인물들은 각자의 처지를 들어 자신을 옹호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냉정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 역시 한편으론 사회적 약자이다, 그에게도 사연과 상처가 있다’는 말로 가해와 피해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 그 자체로 판단될 뿐이다. 그래서 논쟁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호, 불호 역시 이 지점에서 갈릴 것이다.

여성혐오, 페미니즘, 미투(me too)로 들끓고 있는 2018년의 한국사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격렬한 변화의 문턱을 넘고 있다. 이제 ‘나와 상관없는 문제’로 덮어두었던 이들도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왜 ‘충분히 그래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며 행한 강간,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휘두르는 폭력, 사랑의 행위로 포장되는 성폭행, 격려라는 이름의 추행, 선의의 유머를 가장한 희롱’ 을 당한 사람이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불특정다수로부터의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가에 대해.
 
김경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