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음악이야기] 노래가 된 시, 시가 된 노래
등록 2020.06.09 11:01
조회 127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 <개여울>

 

뭐가 보이는가? 몇 줄 읽고 김소월을 느꼈다면 문학작품깨나 읽은 이임에 틀림없다. 몇 소절 입으로 읊다가 정미조의 깊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면 가요를 좋아하지만 나이가 꽤 들었음을 인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눈으로 보면’ 색다른 것이 보인다. 모든 글자를 소리와 뜻이 없는 기호로 바꾸면 각각의 연이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덩어리로 보인다. 이 덩어리가 보인다면 노래가 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셈이다. 노래가 된 시나 시가 된 노래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김소월의 이 시가 될 수 있다.

 

노랫말이 가장 닮아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시다. 언어는 언어이되 간결하면서도 온갖 것이 응축돼 있는 시와 노랫말은 많이 닮아 있다. 일상의 언어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최대한 절제해서 쓰는 것,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속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운율에 얹어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시다. 적당한 길이에 정해진 박자를 지켜야 하고 선율에 말을 실어야 하니 노랫말은 시를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소월.jpg

 

노래가 된 시를 살펴보면 김소월의 시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보인 <개여울>뿐만 아니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되는 동요가 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로 시작되는 <부모>도 있다.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실버들>, <못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도 모두 김소월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 같은 <진달래꽃>도 교과서에 나왔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학생들도 마야가 부른 <진달래꽃> 덕분에 ‘한국인 자격’을 갖추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노래가 된 시의 대부분을 김소월의 시가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김소월 시의 어떤 특징 때문이겠지만 이는 결국 노랫말의 속성을 명쾌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앞서 보인 <개여울>을 기호로 바꾸면 보이는 일정한 덩어리는 그것을 음수율이라고 말하든 음보율이라고 말하든 노래를 만드는 이들에게는 반갑기 그지없다. 일정한 단위로 반복되는 말의 덩어리에 적당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멜로디를 붙이면 노래가 된다. 김소월의 시가 바로 그렇다.

 

이는 결국 노랫말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말해준다. 노랫말은 말은 말이로되 리듬을 타고 가락에 얹혀야 하는 말이다. 너무 길면 정해진 물리적 시간 안에 말을 욱여넣을 수 없다. 말에 어느 정도의 질서가 없다면 박자에 맞게 특정한 리듬을 살릴 수 없으니 노랫말로 적당하지 않다. 시조와 같은 정형률은 아닐지라도 가락을 붙이기에 너무도 적당한 시가 김소월의 시다. 노랫말은 적당한 길이에 적당한 운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특징만으로는 김소월의 시가 그토록 많이 노래가 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김소월, <부모>

 

너무도 쉬운 시다. 심술궂은 국어선생일지라도 학생들을 골탕 먹일 만한 시험문제를 만들기 어려운 시다. 누구든 부모가 있고, 많은 사람이 부모가 되기도 하니 지나간 삶에서 느낀 것과 앞으로 살면서 경험할 것을 엮기만 하면 바로 이해가 된다. 노래가 된 김소월의 시는 이처럼 쉽다. 시를 연구하는 이들은 김소월의 시에서 심오한 무엇을 더 읽어내기도 하겠지만 보통사람들은 그저 눈으로 읽으면 그 내용이 머리로 들어온다.

 

쉬운 삶의 이야기, 이것이 노랫말의 두 번째 특징이기도 하다. 생명의 근원을 노래한 유치환의 시가 노랫말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너무 길어서 도저히 노랫말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란 구절 덕분에 노랫말이 되기도 한다. 적당히 쉽고 적당히 통속적이지만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한 구절처럼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말들이 노랫말이 된다.

 

노랫말은 어쩔 수 없이 시의 동생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를 뛰어넘는 노랫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가왕 조용필이 부른 <슬픈 베아트리체>는 시인 서정주를 감동시켰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소라가 부른 <바람이 분다>는 노랫말 때문에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이 일기도 한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서는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라는 구절은 세상의 어떤 화가보다 더 멋지게 말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노랫말은 노래를 있게 하는 동시에 노래를 잊지 않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노래와 노랫말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는 요즘 노래들이 낯설 수밖에 없다. 어떤 방송사의 주말 프로그램은 노래 하나를 들려주고 그 가사를 온전히 적어내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외워서 쓰라는 것이 아니라 듣고 쓰라는 것인데 여럿이서 몇 번을 들어도 결국은 틀린다. 기억하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 노랫말인 것이다. 과거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노래가 된 김소월의 시를 아는 이들에게는 어렵다. 100년 뒤에도 이런 노래가 기억될지는 미지수다.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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