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10월호] [책이야기] 모두에게 찬밥신세였던 복지국가가 100년 넘게 살아남은 까닭
등록 2020.10.05 11:53
조회 122

복지의 원리(교보문고).jpg

 

자유주의 대표적 사상가 하이에크는 현대 복지국가를 혐오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둬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들을 돕는 복지국가의 철학적 바탕에 나눔과 경쟁혐오 등 집단주의적 사고가 녹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는 수렵과 채취로 먹고살던 석기시대의 야만적인 정념이지 문명화된 현대사회의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가만히 두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여 혁명으로 나설 노동자들을 순치하여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복지국가’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세력 모두에게 ‘찬밥신세’였다.

 

그럼에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대공황 등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속에서 복지국가는 굳건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서유럽의 독일 같은 사회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원리 속에서도 사회보장을 통해 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중국도 공적연금과 의료보험 같은 사회보장 시스템을 받아들여 복지국가의 운영원리 일부를 도입하고 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가 쓴 『복지의 원리』는 이처럼 근대 이후 100년을 안정적으로 지속해 온 체제인 복지국가 탄생의 역사와 그 원리를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한다. 필자는 책에서 복지국가의 생존의 비결을 “국민 대다수가 동조하는 어떤 합리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복지국가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다

필자가 책에서 ‘복지국가의 합리성’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개념은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이다. 존 롤스는 사회운영의 원리로 합의 가능한 원칙을 크게 두 가지로 봤다. 하나는 개인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최대한의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자유의 원칙’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신체장애나 불성실, 그리고 지역적 격차 때문에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여 만든 사회적 부를 누리지 못하는 “불운한 최소 수혜자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부가 배분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다. ‘자유의 원칙’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라면, ‘차등의 원칙’은 누진적 과세와 사회보장 등 사회국가의 원리로 두 가지 가치의 조화 속에 복지국가의 운영원리가 형성된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공격처럼 복지국가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개인’에게 무조건 퍼주는 제도가 아니다. 노동능력을 상실한 절대빈곤선의 시민들에게는 조건 없이 생활을 돌봐 주지만 “복지국가의 사회복지정책은 시민들의 노동활동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위험이 곳곳에 존재한다. 산업재해, 실업, 질병과 은퇴로 인한 소득상실 등이 대표적이다. 국가는 사회보장정책을 통해 개인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노동시장으로 돌아가 소득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면

한국은 복지국가의 물적 토대가 되는 산업화를 이뤘으나 사회보장의 수준이 높지 못했고, 민주화 이후 임금노동자의 힘이 커졌지만 기업별 노조 중심으로 노동시장의 임금정책과 공공복지에 개입할 역량이 부족했다. 지역구 소선거구제에서는 공공복지와 같은 국가 전체적 의제가 쟁점이 되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이 분산되는 내각제와 달리 대통령 혼자 욕을 먹는 우리 정치제도에서는 복지확대의 결정적 조건인 증세의 문제를 다루기 어렵다. 필자는 책에서 이러한 정치사회적 조건 때문에 한국이 복지를 확대해간 유럽에 비해 점차 복지를 축소해 가는 영미 자유주의 국가나 일본의 모습과 유사해질 것으로 우려한다.

 

『복지의 원리』는 이처럼 복지국가의 운영원리를 살펴보는 동시에 향후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여러 복지 정책과제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높은 보장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의료보험이지만, 과잉 의료 이용률로 증가하는 의료비 지출이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만큼, 의사의 과잉 진료와 환자의 과잉 의료 이용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한다. 국민연금의 경우 보험료를 현실화하지 못하면서 소득 대체율만 올려서는 재정파탄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퇴직연금을 국민연금으로 편입하여 재정안정을 꾀할 것을 충고하기도 한다.

 

 

이동철 회원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9.10월호 PDF 보기▼
https://issuu.com/068151/docs/________2020__9.10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