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10월호] [음악이야기] 클래식? 국악? 뭣이 중헌디?
등록 2020.10.05 11:58
조회 146

1 테너 박인수.jpg

테너 박인수가 1933년 발매한 애창곡집 '만남' / 출처=지니뮤직
 

1980년대 중반, 미국 클래식 성악계에서 대한민국 성악가로 크게 위상을 떨치고 돌아온 테너 박인수 선생이 귀국 후 몸담고 있었던 국립오페라단에서 반강제로 퇴출됐다. 이유는 대중가요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라는 크로스오버 곡(crossover music‧어떤 장르에 이질적인 다른 장르의 요소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음악)을 부르고 음반을 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일로 박인수 선생은 대중적 인기가 더욱 높아졌었고 ‘향수’가 크게 히트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국내 최초의 크로스오버 테너 가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 당시 연판장에서 클래식 음악계 사람들이 박인수 선생 퇴출 지지 서명을 할 정도였으니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시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를 관통하고 있었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2 이동원 향수.jpg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가 포함된 앨범의 재킷 / 출처=yes24

 

 

‘귀족적’‧‘고품격’은 중요하지 않다

80년대 우리사회는 독재와 권위주의가 맹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고교 이상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을 정도로 엄혹했던 시기였다. 당시는 포크음악과 락, 디스코, 뉴웨이브 등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며 대중음악계를 이끌어갔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군사정권 시대의 음반 사전 검열제도는 자유로운 창작 의지를 많이 꺾기도 했다. 가사 검열은 물론, 들국화의 전인권과 고 유재하의 경우와 같이 창법 미숙, 가창력 미달로 금지곡 가수가 된 경우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권위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클래식 음악계는 자신들의 음악을 귀족적 고급음악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다. 대중음악에 비해 고품격의 음악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위기가 견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클래식 음악인들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헨델과 같은 대가도 그의 시대에는 한낱 귀족들에게 고용된 신분이었다는 것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얼마나 계몽적이며 대중과 호흡하려 했던 작품인지를,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컨트리 가수 존 덴버와 함께 ‘Perhaps love’를 불러 전 세계인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때가 1981년도였음을…….

 

3 도밍고 덴버.jpg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컨트리 가수 존 덴버 / 출처=게티이미지


4 앨범 재킷.jpg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함께 부른 ‘Perhaps love’ 앨범 재킷 / 출처=Discogs

 

 

권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는 ‘감동’

국악으로 분야를 돌려보면 필자는 주말 늦은 시간이나 아주 이른 시간 공영방송 KBS에서 방송해주는 <국악한마당>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국악을 접했던 기억이 난다. 또는 <서편제>라는 영화를 통해 오정해라는 국악인을 인상 깊게 본 정도가 경험의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다양한 방송에 국악인 출신 가수들이 등장하여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송소희, 유태평양 등 국악 ‘신동’들이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퓨전 국악그룹이 여러 팀 등장해 해외시장에 진출하기도 한다. 국악은 국악인들의 전유물, 노년층들이 즐기는 음악,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명맥을 계승해 나가야 할 우리의 전통 음악이라는 고정관념들이 깨지는 순간이다. 국악인들이 방송에 나오면 그들의 연주가 기대되고 감동을 크게 받는 경험이 우리 모두 늘어나지 않았을까.

 

클래식 성악으로 다진 출중한 실력으로 ‘성악트롯돌’로 거듭나 ‘트바로티’로 불리는 김호중의 경우 박인수 선생이 국립오페라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80년대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김호중은 탄탄한 성악실력을 기반으로 트로트 음악은 물론이고 팝과 락,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각 장르를 넘나들며 청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80년대 기준으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클래식 성악계의 이단아가 아닌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판소리 국악을 전공하고 각종 상을 휩쓸던 국악소녀 송가인이 국악을 처음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금과 같은 트로트 대세 가수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탄탄한 국악을 베이스로 하는 송가인의 실력은 <미스 트롯> 초반부터 여실히 드러나 1위까지 거머쥐었으며 그녀 역시 각종 음악 무대 및 방송을 통해 많은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뿐인가? <팬텀싱어3>의 준우승팀 라비던스의 고영열은 ‘피아노 치는 소리꾼’으로 쿠바, 그리스 등 세계 각국의 음악으로 청중들을 인도하며 기존의 것들과 다른 감동을 줬다. 같은 팀원으로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예일대 음대에서 공부한 성악천재 존 노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의 경지를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무대 위에서 음악을 가지고 청중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청중들의 시간과 감정을 빚으로 받아서 연주로써 갚아야 하는 예술 행위이다. 연주자 스스로를 뽐내는 자리가 아닌 연주자를 향한 청중의 기대에 보상을 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가창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가수 이선희 씨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언제 어느 무대에 서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말소리도 작게 내고 목에 안 좋은 음료나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는 생활을 통해 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장르에 따른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음악인과 대중들에게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래서 뭣이 중헌디?”

 

김인중 회원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9.10월호 PDF 보기▼
https://issuu.com/068151/docs/________2020__9.10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