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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 송건호 20주기 세미나] 언론불신 벼랑 끝에서…송건호를 생각하다
등록 2021.12.22 10:59
조회 270

 

<편집자 주>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2월 16일 청암언론문화재단, 한겨레와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 '역사 앞에 거짓된 글을 쓸 수 없다'를 공동주최했습니다. (https://www.ccdm.or.kr/xe/actiphoto/307480) 한겨레는 '언론불신 벼랑 끝에서…송건호를 생각하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보도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23654.html) 민언련은 기사 작성자인 김영희 선임기자의 양해를 구해 민언련 홈페이지에 전문을 게재합니다.

 


 

언론불신 벼랑 끝에서…송건호를 생각하다

 

[청암 20주기 세미나]

1975년 기자 대량해고 항의
편집국장직 내던지고 재야로
한겨레 창간하며 제도권 복귀

동아일보 나온 뒤 생계 공포에도
정권의 여러차례 요직 제안 거부
“자신의 생활부터 떳떳하게” 실천

박용규 교수, 송건호 사상 짚어
“언론인, 기능적 역할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 해결 위해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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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역사 앞에 거짓된 글을 쓸 수 없다'가

청암언론문화재단과 민주언론시민연합, 한겨레신문 공동 주최로 16일 서울 종로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ahng@hani.co.kr

 

<한국현대사론>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와 공저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역사가, 1980년 5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기초하고,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재야 원로,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 권력·자본과 타협하지 않았던 언론인. ‘시대의 논객’이나 ‘사회의 어른’이란 말이 낯설어진 요즘, 오는 21일 20주기를 맞는 청암 송건호(1926~2001) 선생의 삶과 사상이 주는 울림이 크다.

 

청암언론문화재단과 민주언론시민연합, 한겨레신문이 공동으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연 그의 20주기 기념 세미나는 청암 언론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박용규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가 ‘언론 불신 시대 송건호 언론사상의 의미’를 주제로 발제하고, 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의 사회로 최승호 <뉴스타파> 피디, 권태호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실장, 송종호 <서울경제> 기자, 박상규 진실탐사그룹 <셜록> 대표기자, 한혜정 <한성대신문> 부장기자가 토론을 벌였다.

 

‘언론인’ 송건호의 경력은 화려하다. 1953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시작해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거쳤다. 그랬던 그가 1975년 <동아일보>의 기자 대량 해고 사태에 항의해 편집국장직을 내던지고 ‘재야 언론인’의 길을 선택했다. 동아투위 출신 성유보 전 <한겨레> 편집위원장은 “우리보다 더 용감하게 사표를 썼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송건호는 정말 귀한 분”이라고 말한 적 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의 월간지 <말> 초대 발행인을 맡았던 송건호는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면서야 신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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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렴한 언론인의 표본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치 담당 논설위원들이 갖던 정기모임에서 다른 이들이 이런저런 청탁을 할 때도 “포항제철을 견학하고 싶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청암 송건호>, 2018). 동아일보를 나온 뒤 생계에 대한 불안이 공포로 변해 일종의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70·80년대 정권의 여러차례에 걸친 요직 제안을 거부했다. “사회의 부정, 부패, 그 밖의 각종 악과 싸우는 언론인들은 우선 자신의 생활부터 모범적이 되어야겠다. 언론인은 떳떳해야 한다”(<민족지성의 탐구>, 1975)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셈이다.

 

박용규 교수는 1966년 <경향신문> 강제 매각과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좌절, 그리고 1968년 독일에서 머문 5개월이 송건호 사상 형성에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짚었다. 언론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뿐 아니라 이에 굴종하는 언론사주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고, 일찍부터 편집권 독립의 제도화와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송건호 사상의 핵심을 그는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기여해야 하고, 언론인이 기능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이념지향적 언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송건호는 “객관주의에 의한 언론은 주관을 배제하므로 언론이 기능화하여 언론에서 사상성이 배제되고 수단화·도구화되어 언론은 필요에 따라 어떠한 사회세력에도 봉사할 수 있는 한낱 테크닉으로 화한다. 언론의 도구화는 언론인의 샐러리맨 의식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요즘 많은 언론인들이 철저하게 사상성이 결여된 기능인이 되었다”(1978)고 비판한 바 있다.

 

타협적인 ‘현실의 길’이 아니라 ‘역사의 길’을 걸었던 송건호의 삶을 지금 언론인들에게 그대로 따르라 할 수 있을까. 매체 환경이 크게 바뀌었어도 송건호의 주장은 ‘사안의 본질을 파헤치는 진실 보도의 추구’라는, 지금도 유효한 언론의 사명과 맞닿아 있다. ‘언론 자유’라는 말은 흔해도 ‘무엇을 위한 언론 자유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옅어진 시대, 정파적 보도에 대한 반작용일 순 있지만 ‘객관 보도’가 금과옥조가 된 시대에 송건호 사상은 “언론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지표가 되고, 언론 불신이라는 위기를 극복할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박 교수는 말했다.

 

김영희 선임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