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문_
대선 맞이한 경제지들 일제히 ‘정치 혐오’, 그 목적은 ‘대기업 지키기’
등록 2017.03.27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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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의 대선 보도 모니터링을 새로 시작하면서
경제지의 대선 보도 모니터링을 새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경제지에 대한 모니터링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인력이나 시간 등의 여건에서 열악한 언론감시 주체들이 종합지에 대한 모니터링이 긴급히 요구되는 사정에 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며 경제라는 ‘전문’적인 매체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잖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지의 위상과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에 대한 모니터링과 비평이 필요하다는 내외부의 요구가 커지고 있으며, 이에 경제지의 대선 보도에 대한 비평을 이번에 시작하게 됐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경제지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지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기존의 매일경제, 한국경제, 서울경제 등 30~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매체들 외에 신생 매체들이 꾸준히 생겨났다. 이는 독자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날로 어려워져 가는 언론 경영 환경에서 경제지가 종합지들에 비해 수익을 내기에 용이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지들은 경제와 관련된 정보, 경제 주체들의 동향을 제공하며 세계경제의 흐름을 분석해주고, 경제운용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과제에 대해 유용한 기사와 논설들을 싣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폐해와 부작용도 매우 크다. 경제지는 ‘경제’에 대한 인식과 경제 관련 의제 설정, 경제 관련 용어 사용 등에서 여론을 왜곡시키고 독자들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경제지에 넘쳐나는, 마치 공식과도 같은 현실 인식과 표현들은 경제의 도우미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의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거 늘어난 경제지들이 유포하는 정보와 지식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그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언가의 존재가 오히려 그것의 부재를 보여주며,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 얘기하지 않는 무언가가 오히려 그것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경제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같은 왜곡과 호도는 경제지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즉 ‘경제 전문’ 매체에서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사들에 씌워지는 ‘후광 효과’와 겹쳐 더욱 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 시작하는 이 경제지 대선 보도 모니터링이 경제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을 지적하고자 한다.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경제에 대한 협소한 인식이 협소한 보도를 낳고 협소한 보도가 다시 협소한 인식을 부른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을 부르는 인과 사슬의 악순환이다. 이는 기업(압도적으로 대기업)과 언론 사이의 관계에서, 언론이 대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 중계하고 유포하며 대기업은 다시 언론의 그 같은 논리와 지원을 토대로 더욱 ‘친(대)기업적인’ 논리를 펼치는 식으로도 나타난다. 이중의 인과-악순환 관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경제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 경제는 결코 ‘경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가 그런 것처럼 경제 역시 우리의 삶에서 경제가 아닌 것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가 그런 것처럼 경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 모든 국면에서 작동한다. 경제는 경제 아닌 것과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총체에 대한 안목이 빠진 경제의 강조가 매우 공허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만약 ‘경제’라는 게 별도로 있다고 굳이 가정한다면 경제지에서 말하는 ‘경제’는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거의 ‘절대선’의 지위에 올라 있다. ‘경제’는 다른 모든 것을 그 이름 앞에 침묵시키고 무릎 꿇게 하는 마법의 지팡이다. 전능의 주문이며 칼이다. 이는 흔히 ‘시장경제’라는 말로도 포장된다.


경제든 시장경제든 경제의 신성시는 다른 것들과의 대비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에 부정적 낙인을 찍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경제지에서 경제는 선이며 정치는 악으로 묘사된다. 동양에서의 경제가 원래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서 정치 그 자체였다는 것, 서양에서도 20세기 초에 와서야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경제학은 바로 정치경제학을 가리키는 것이었듯이 경제는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제지에서 정치(정치의 혼탁한 면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는 절대로 경제에 개입해선 안 되는 것으로, 그래서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정치에 의한 경제의 오염으로 규정된다.


‘반노동’, ‘친기업’ 관점 드러낸 경제지들의 ‘정치 혐오 보도’
특히 선거 때에는 이 같은 경제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정치, 정치의 포퓰리즘에 의한 경제의 훼손에 대한 우려가 특히 경제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쏟아진다. 이번 대선에서도 벌써부터 그런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서울경제의 3월 23일자 <균형추 무너진 노동개혁-경제 살릴 노동개혁 사라지고...표심 노린 설익은 정책 쏟아내고>(3/23 http://bit.ly/2n8niTN)라는 기사에 그런 점이 집약돼 있다. 단지 이 신문에 대해서만 지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많은 경제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취하는 논지여서 이 기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 경제지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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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경제 <균형추 무너진 노동개혁-경제 살릴 노동개혁 사라지고...표심 노린 설익은 정책 쏟아내고>(3/23)

 

이 기사는 “대선주자들이 성과연봉제 등 '박근혜표' 정책을 무조건 폐기하고 있다”면서 이를 포퓰리즘 정책으로 규정했다. “정치권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핵심으로 하는 근로기준법 처리를 놓고 진통을 겪으면서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현재 여야의 논의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노동개혁 법안은 근로기준법과 산재보험법, 고용보험법 등 세 가지다. 기업의 숨통을 틔우는 경제활성화법인 파견법과 기간제법은 야권의 반발로 일찌감치 제외된 탓”이라면서 “야당이 ‘ABP(Anything But Park)’, 즉 박근혜 정책 폐기에 나서고 있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들은 현 정부의 주요 노동정책은 모조리 뒤엎을 태세다. 대표적인 것이 공무원 성과연봉제다.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경우 지난해 6월 도입이 완료됐으며 올해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고도 주장했다. 또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8일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출범식에 참석해 “성과연봉제는 충분한 노사 합의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면) 즉각 폐지하겠다고 분명히 약속드린다”고 한 것을 ‘목소리를 높였다’고 보도했다. 


지금 드러나고 있듯이 박근혜 정부의 정책 기획 및 입안 과정의 부실에 대한 진단과 그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와는 별개로, 노동정책 폐기 및 보완 움직임은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에 대해 많은 비판과 반대, 지적들이 있었던 것의 결과이다. 단순히 ‘반 박근혜’ 즉 ‘ABP’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문 전 대표의 발언을 보도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고 쓴 것도 무리한 주장을 무책임하게 내뱉고 있다는 뉘앙스로 읽히도록 ‘세심한’ 단어 선택을 했다.  


이 기사는 또 “근로시간 단축 법안이 2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처리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면서 “산업계는 노동정책의 균형추가 이미 무너진 상태라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고 했는데, ‘노동정책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대체로 기업에 비해 노동자는 약자로 분류되는 게 상식적인 이해다.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노동계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며 노동계가 항상 약자인 것도 아니다. 다만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도록 하려는 움직임이 표출되는 것이 당연하며, 특히 이는 선거 국면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데, 이 기사는 이를 균형추의 붕괴로 우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여러 경로로 대기업의 입장을 정부 정책에 반영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균형추가 무너지고 있다’는 식의 시각을 보여준 적이 과연 있었는가?


 이 기사는 또 “정치권은 노동계의 표심만 바라보며 근로기준법 논의를 졸속으로 진행하고 있다”면서 “현행 근로기준법상의 일부 조항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 기업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고 근기법 개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그렇다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부당 노동행위의 빈발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매우 뒤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떤 논지를 전개해 왔는가.


이 기사는 사실의 왜곡과 부정확한 전달도 불사하고 있다.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의 “정년 60세 시대에 공공 부문조차 연공서열 위주의 호봉제로 되돌리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일부 대선 주자들의 주장을 왜곡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의 주장은 성과연봉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논의와 합의를 거치자는 것이며, 호봉제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석학’들의 발언 중 ‘정경유착’은 싹둑…교묘한 편집도
<“기업‧자본가 안 떠나게 해야 노동자도 살고나라도 부강”>(3/24 http://bit.ly/2nmxHNn)라는  기사에서도 '친기업적'인 주장을 펴기 위해 사실을 일방적으로 취사선택한 것이 보인다. 한국경제학회와 한국정치학회가 23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연 ‘위기극복과 국민통합을 위한 시국 대토론회’ 내용을 전달한 이 기사에서 기자는 주요 참석자들의 발언을 내세워 기사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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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경제 <“기업‧자본가 안 떠나게 해야 노동자도 살고나라도 부강”>(3/24)
 

기사는 경제·정치석학들이 “기업의 투자의욕을 살려야 경제가 살아난다”며 차기 대선주자들이 쏟아내고 있는 선심성 기업 공약에 작심하고 ‘쓴소리’를 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호히 끊되 기업의 숨통을 조여서는 안 된다”며 “투자의욕을 살려 기업도 자본가도 이 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노동자도 살고 나라도 부강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목에서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단호히 끊어야 한다는 전반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발언은 좀 더 기업 측에 대한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발언의 요지랄 수 있다. 그는 “이번 탄핵사태를 보며 사회 양극화에 대해 알기는 했지만 이렇게 생소하면서도 절실하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며 “국가 경제가 총량으로 발전했지만 그 발전이 국리민복과 전혀 직결되지 않는 상황을 통렬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목에 전혀 언급되지 않아 제목만으로는 이날의 기업에 대한 쓴 소리를 전혀 읽을 수가 없다.

 

‘경제 주체’를 대기업 편향적으로 보는 태도
경제지의 이 같은 논지 경향과 그 논지를 펴는 데 있어서의 일방성은 경제지가 우리 ‘경제’의 주체를 매우 일부분의 집단으로 한정하고 있는 데서 크게 비롯된다. 우리 경제를 구성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매우 다양하다. 기업과 정부,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실업자, 주부, 심지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어린이들도 경제 주체이다. 모든 국민들이 차지하는 그 몫에서 크고 작은 것은 있지만 모두 경제활동의 주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지에서 설정한 ‘경제라는 이름의 축구 경기장’에서 1부 리그의 주전 선수는 대개의 경우 대기업과 정부로 국한된다. 대기업과 정부의 정책결정집단이 아닌 이들은 2부, 3부 리그에서밖에 뛰지 못하며 프로축구 경기에 대한 방송의 중계가 그렇듯이 2부, 3부 리그에 대한 경제지의 주목도는 매우 낮다. 


특히 노동계는 경제의 주체가 아닌 ‘문제’의 주체다. 노동계와 관련된 사항은 ‘문제’로 분류된다. 서울경제 <사설/노동계 목소리는 커지고 재계는 눈치만 보는 대선판>(3/25 http://bit.ly/2nZucQs)에서 경제계와 노동계에 대해 얼마나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다. “경제계의 제언이 눈길을 끄는 것은 과거 대선과 달리 규제 개선이나 신성장 산업 육성 등 애로사항을 담은 건의문이 아니라 경제 밑그림을 모색하자고 호소한 점이다. 마치 유력 대선주자의 싱크탱크에서 미래 국가 운영 어젠다를 제시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라고 평가했는데 이에 대해 대한상공회의소의 “특정 이슈에 대해 찬반을 얘기하거나 떼쓰는 시대는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 설명하고는 “이런 변화는 최근 반기업 정서가 판치는 대선판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주자마다 기업을 때려잡겠다며 나서는 판국에 시시콜콜한 친기업 정책을 공약으로 담아달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호소력이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셈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노동계에 대해선 “선거 국면을 틈타 한몫 챙기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면서 “공무원 노조들은 성과연봉제 폐지나 연금지급 60세 환원, 학교 행정실 법제화 같은 염치없는 요구마저 수용하라며 윽박지르고 있다”고 쓰고, “한심한 것은 대선주자마다 노동계 집회에 총출동해 백지수표 끊어주듯 도와주겠다고 맹세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인이라면 악수하는 것도 꺼리는 대선주자들이 경쟁적으로 노동단체를 방문해 집단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장면마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정도다”라고 적었다. 경제계는 ‘밑그림’ ‘미래 국가 운영 어젠다’로 적은 반면, 노동계의 요구는 ‘선거국면을 틈타 한몫 챙기려는’ 것은 물론 ‘염치없는 요구’로까지 비하되고 있다.


이 사설은 말미에 “재계와 노동계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두 바퀴다. 어느 한 바퀴만 앞서 간다면 한국 경제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노동계가 경제의 두 바퀴라는 인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이런 말도 바로 아래에서 “대선주자들이 진정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노동계의 환심을 사는 데 골몰하지 말고 ‘이대로는 한 해도 더 갈 수 없다’는 경제계의 절박한 목소리까지 고루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로 무색해지고 있다.


 자본 없는 노동은 있을 수 있지만 노동 없는 자본은 있을 수 없다는 것, 노사(勞使)라고 할 때 사보다 노를 앞세우는 데서도 보이는 선후관계, 주(主)-부(副) 관계에 맞게 하라는 요구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노동계를 경제의 한 주체로, 노동문제가 아닌 경제문제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기업 입장은 ‘절박한 호소’로 포장하면서 대선 공약은 무조건 ‘포퓰리즘’
3월 24일자 경제지들에는 대한상의의 정당들에 대한 호소문이 크게 실렸다. 한국경제 <“대선주자들 공약, 시장경제 틀은 지켜달라”>(3/23 http://bit.ly/2n8oMh8)에 담긴 경제지들의 보도 태도를 보면 노동계에 대한 태도와 극명히 구분되는 경제계의 주장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경제계에 대해 감정이입이나 동일시라고도 할 만한 우호적 시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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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대선주자들 공약, 시장경제 틀은 지켜달라”>(3/23)

 

이 보도의 소제목은 ‘절박한 대한상의 오늘 각 당에 호소문 전달’이다. ‘제19대 대선 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을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등 다섯 개 정당 대표에게 전달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이 기사는 제목에서부터 기업계의 주장을 ‘절박’과 ‘호소’라는 말에 담아 표현했다. 


 경제지들이 특히 주목한 이 호소문의 대목은 “대선주자들에게 재벌개혁 등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공약이 난무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만 늘어나는 상황에선 더 이상 기업 경영이 어렵다는 절박함에서다”라는 것이다. 재벌개혁을 ‘포퓰리즘’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 같은 인식에 대해선 추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다만 여기선 대선 주자들의 공약을 싸잡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듯 한 시각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정치와 선거에 대한 냉소와 비하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지들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이긴 하지만 특히 경제지들은 선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실에서의 선거가 보이고 있는 적잖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점에 대한 이해가 결여돼 있거나 매우 부족한 것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으로서 현실에 대한 진단 간의 경쟁이고, 비전과 비전(혹은 無비전)의 경쟁이며 정책과 정책 간의 경쟁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매우 모자라다. 


이는 선거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 평상시 보여주는 태도다. 예컨대 국정감사 기간에 종합지들도 그렇지만 경제지는 국회(의원)에 대한 비난과 조롱, 국감 무용론을 넘어서 일부 의원들이 빚는 물의를 국회 무용론으로까지 확대하는 여론을 앞장서 유포한다. 경제지들은 정치가 엉망이며 개선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실은 정치의 개선과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 중의 하나가 경제지들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극단으로 치닫는 ‘친대기업 논리’…중소기업에도 맹공
경제지의 친기업적 논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칼럼을 살펴보자. 한국경제 <다산칼럼/‘기업의 자유’가 위기다>(3/24 http://bit.ly/2mHjyxt)는 기업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매우 무리한 논리 전개를 감행하고 있다.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재욱 경희대 교수·경제학의 이 기고는 매우 독창적인 논리, 그러나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반쪽 시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이번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 침해’ 부분이다. 청와대가 대기업들에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대한 출연을 요구한 것은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헌재가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의 중요성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얼핏 당연한 논리로 읽힌다. 그러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나타났듯이 검찰과 언론(여기에는 이 칼럼을 게재한 한경 자신도 포함된다)이 파헤친 이번 사태의 진실은 권력에 의한 기업의 일방적인 피해가 아니라 권력과 재벌 간의 주고받기, 부정과 비리의 교환관계에 가깝다. 


그러나 이 칼럼의 필자에게는 그 같은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또는 외면해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훼손하는 정책들과 발언을 쏟아내고 그에 찬동하고 있다”면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을 위협하는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소기업인들이 중소기업적합업종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조차 ‘기업의 자유와 경쟁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서는 ‘기업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는 우리 사회에서 역사 유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친다.

 

전경련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꾸짖을 자격 있나 

아래 기사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968년 이후 50년 가까이 유지돼 온 명칭을 '한국기업연합회'(한기련)로 바꾸기로 한 것에 대해 새롭게 태어나라고 주문한 매일경제의 사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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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사설/전경련 이름만 바꾼다고 될게 아니다 새롭게 태어나라>(3/25)
 

이 사설은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정경유착 등 과거로부터의 확실한 단절”이라면서 “지금 국민이 전경련에 갖는 불신은 너무 크고 깊어 명칭 변경 정도로 인식을 바꾸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유에 반하는 입법을 저지하고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도를 감시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전경련은 이를 권력 또는 보수단체와의 은밀한 뒷거래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전경련은 투명한 이념집단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보는 독자들의 상당수는 매우 곤혹스러울 듯하다. 마치 지금까지 전경련의 무리한 행태를 전혀 몰랐거나 열심히 지적을 해 온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은 물러난 최고 권력자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을 연상케 한다. 사설이 전경련의 그간의 탈선을 지적하면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정경유착을 서두에 지나가듯 한마디로 언급했을 뿐 어버이연합과의 뒷거래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도 궁색스럽다. “전경련은 이름만 바꾼다고 될 게 아니다”고 사설은 꾸짖고 있지만 경제지들 역시 사설의 결론처럼 ‘새롭게 태어나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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