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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을 속보로 받아쓰는 언론, 한반도 평화체제 흔들기?
등록 2018.05.11 16:09
조회 214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곧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북미 양국은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2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국 고위급 관계자들은 기존의 북핵 해결 원칙인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대신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내세웠고,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외에 탄도미사일과 생화학 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까지 ‘즉시 폐기 대상’으로 포함시키며 북한을 압박했습니다. 이에 북측도 6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위는 모처럼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세를 원점으로 되돌려 세우려는 위험한 시도”라며 경고 메시지를 내놨고 7일에는 김정은 위원장의 전격 방중이 이뤄졌습니다. 양측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협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물론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10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4월 초에 이어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물밑 협상을 진행했고 3명의 억류 미국인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이 만남에 ‘만족한 합의’라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주한미군 기고 논란’ 다음날 나온 ‘트럼프 주한미군 감축 속보’ 
북미회담 및 비핵화가 워낙 첨예하고 중대한 사안이다보니 최근 언론의 보도 양상에는 우려 섞인 반응들도 엿보입니다. 특히 주한미군 거취를 놓고 보수언론에서 극히 민감한 보도들이 나왔습니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2일,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포린어페어> 기고문에서 ‘주한미군 철수 기고’를 주장했다며 맹비판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문 특보는 “철수 주장한 적 없다. 논의에 대한 준비 필요성 얘기한 것”이라 반박했으나 그간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훈련 폐지를 요구할 것이라며 정상회담에 불신을 표했던 보수권은 문 특보 해임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남북미 모두 현재 이뤄지는 회담에서 주한미군을 의제로 거론한 적조차 없고 ‘주한미군 관련 논의’ 자체를 터부시하는 태도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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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4일, ‘주한미군 감축 검토’ 외신을 속보로 받아쓴 YTN <뉴스타워>

 

이런 가운데 4일, YTN‧연합뉴스TV‧경향신문‧중앙일보‧조선일보 등 대다수 매체에서는 “트럼프,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라는 속보를 냈고 주한미군 논란은 일파만파 번졌습니다. 4일 오전 10시 경 YTN <뉴스타워>(5/4)는 진행 중이던 대담을 중단한 채 <NYT, “트럼프, 펜타곤에 주한미군 감축 검토”>라는 자막과 함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에 대한 감축을 펜타콘에 검토해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속보”를 전했고 “문정인 특보의 발언과 관련해서 논란도 한 차례 있었습니다마는 주한미군에 대해서 미국이 이제 감축을 검토하는 것 아니냐 하는 보도”라 설명했습니다. 같은 시각 연합뉴스TV <뉴스포커스> 역시 똑같은 속보를 내며 긴장감을 높였고, 채널A도  10시 18분 경, 방송 중이던 <돌직구쇼+>에서 속보를 냈습니다. 신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앙일보 <NYT "트럼프, 주한미군 감축 검토 명령">(http://bitly.kr/dlQu ) 조선일보 <NYT “트럼프 대통령 美국방부에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http://bitly.kr/55iy ),  경향신문 <뉴욕타임스 “트럼프, 국방부에 주한미군 감축 검토지시”>(http://bitly.kr/HJm1 ) 등 같은 시각, 같은 내용의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외신 보도 나오자마자 ‘받아쓰기 속보’? 꼭 그래야만 했을까
이 속보들은 제목만 봐도 특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모두 뉴욕타임즈, 즉 외신 보도를 그대로 받아 속보로 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타임즈는 현지시각 3일, <트럼프, 펜타곤에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https://nyti.ms/2HOM7zu )에서 복수의 미국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국방부에 주한미군 병력 감축에 대한 선택지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신문‧방송들은 곧바로 제목의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속보로 받아썼습니다. 뉴욕타임즈 보도에 대한 사실관계 검증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고요. ‘트럼프도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사실인 것처럼 전달됐습니다. 


민감한 보도가 나오자 청와대와 백악관이 곧바로 진화에 나섰습니다. 청와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핵심 관계자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고 반박했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대통령은 국방부에 주한미군 감축 방안을 짜라는 요청을 한 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외신을 속보로 받아쓰는 과정에서 한미 양국 당국자의 반론권 역시 전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뉴욕타임즈 보도가 나오자마자 속보를 낸 YTN‧연합뉴스TV 등 매체의 보도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입장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일말의 취재 과정 없이 타 매체의 인용 보도, 그것도 외신의 익명 인용 보도를 곧바로 속보로 내는 태도가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모범사례로 꼽을 만한 매체는 한겨레입니다. 한겨레는 관련 최초 보도를 타사보다 30분 정도 늦은 10시 33분에 냈습니다. 한겨레 <NYT “트럼프, 주한미군 감축 옵션 준비 지시”…청 “사실무근”>(http://bitly.kr/5Lyb )는 뉴욕타임즈 보도 내용과 함께 청와대 입장까지 포함해 반론권을 보장했습니다. 타사가 모두 속보에 매달리며 ‘트럼프의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를 부각한 것과 다른 태도입니다. 

 

문정인 특보 비난했던 언론, 뉴욕타임즈는 왜 그냥 받아쓰나
우리 언론의 속보에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뉴욕타임즈 보도를 문정인 특보 기고문 논란과 연결짓는 겁니다. YTN <뉴스타워>의 이재윤 앵커는 “지금 문정인 특보의 발언과 관련해서 논란도 한 차례 있었습니다마는 주한미군에 대해서 미국이 이제 감축을 검토하는 것 아니냐 하는 보도가 지금 나와 있습니다”라고 했고, 채널A <돌직구쇼+>의 박민혁 기자는 “저 속보를 보니까 문정인 특보의 얘기가 맞을 수도 있어 보여요. 철수가 아니기는 하지만”라며 아예 ‘문정인 특보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비난을 기정사실로 전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뉴욕타임즈 보도를 자세히 분석하거나 검증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오류이자, 자가당착에 해당합니다. 


뉴욕타임즈는 해당 기사의 서두에서 “당국자는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북한 핵무기에 관한 북미 정상 간 협상 카드로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협정은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2만8500여명의 주한 미군의 필요성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스스로 보도한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가 사실이더라도, 이는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가 아니며,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될 시 주한미군의 주둔 정당성이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 겁니다. YTN과 연합뉴스TV, 채널A는 해당 보도를 속보로 받아쓰면서 유독 이 내용은 누락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뉴욕타임즈가 보도한 미 당국자 입장이, 우리 언론으로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며 집중포화를 맞은 문정인 특보 기고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겁니다. 문정인 특보의 <포린어페어> 4월 30일 기고문에서 논란이 된 문장은 “만약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은 어떻게 되는가? 평화협정 채택 이후에도 미군이 계속 한국에 주둔할 명분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감축과 철수에 대해 거센 보수층의 반발이 있을 것이고, 이것은 문 대통령에게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로 작용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똑같은 취지의 분석인데 우리 언론은 문정인 특보에게만 ‘주한미군 철수론자’라며 비판을 퍼부었고, 뉴욕타임즈 보도는 무려 속보로 받아썼습니다. YTN, 연합뉴스TV, 채널A 모두 뉴욕타임즈의 바로 이 중요한 내용을 속보에서 아예 빼버렸고, 오히려 ‘문정인 특보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현실화된다’는 것처럼 보도해버렸습니다. 심각한 왜곡이자, 편협한 이중 잣대입니다.

 

분석 사라진 ‘외신 받아쓰기 속보’, 우리 언론의 바닥 드러냈다
우리 언론이 일제히 ‘트럼프의 주한미군 감축 검토 지시’라는 자극적 메시지에만 이끌려 받아쓰기 속보를 내면서 드러난 문제점은 더 있습니다. 바로 엄중한 안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분석적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한미군 감축’ 이슈는 진보, 보수를 떠나 중대한 사안입니다. 언론은 뉴욕타임즈 보도가 사실인지 검증해야 하고, 사실여부를 떠나 이 소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시민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뉴욕타임즈를 받아쓴 우리 언론 중 그런 역할을 다 한 사례는 한겨레 뿐입니다. 


한겨레의 관련 첫 보도 <NYT “트럼프, 주한미군 감축 옵션 준비 지시”…청 “사실무근”>(http://bitly.kr/5Lyb )는 단지 청와대 반론까지 보장한 것이 아니라 뉴욕타임즈 보도의 상세 내용을 모두 전하며 그 의미를 짚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거론되고 있는 주한미군 논의가 ‘한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차원의 문제이지 북미 정상회담과는 별개라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한겨레는 “트럼프 행정부는 이후 군대 유지 비용 전체를 한국이 지불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규모와 배치를 재고하는 것은 북한과의 외교 상황과는 관계없이 이미 이뤄졌어야 할 것이었다”는 뉴욕타임즈 보도 내용을 전달했고 “북-미 평화협정 등 한반도의 전략적 지형 재편 움직임을 앞두고 주한미군의 존재와 주둔 규모의 적절성,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질 것”이라 추론했습니다. 또한 ‘트럼프의 감축 검토 지시’가 사실이더라도 “적대국들은 물론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협상용’으로 군사·무역 분야에서 강경한 언급과 조처를 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 지시가 실행 단계로 접어들지 않을 개연성도 상당해 보인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한과 중국을 향한 일종의 유화책일 가능성”,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일 가능성” 등 다양한 시각을 보여줬습니다. 모두 타 매체 보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가시권 들어온 평화협정, 주한미군 논의 자체를 터부시할 순 없어 
뉴욕타임즈 보도를 속보를 받아쓴 우리 언론의 행보에서 북한 또는 주한미군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념적 이분법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문정인 특보의 기고문을 논란으로 키우기 위해 2일부터 관련 보도를 쏟아냈고 <“문정인 발언, 항상 실현됐다”…주한 미군 철수 논의 현실화되나>(5/2 https://bit.ly/2wvN3Yk ) 등 ‘주한미군 철수 현실화’를 거론하는 식으로 보수권을 자극했습니다. 4일 ‘뉴욕타임즈 속보 받아쓰기’ 소동 역시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우리 언론은 ‘미국도 주한미군 감축을 검토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메시지를 유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한국당은 10일, “주한미군 철수 조짐 보이면 의원 총사태”라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주한미군 논의 자체를 터부시하는 비민주주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비핵화가 진전되고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거취는 당연히 논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 27일 매티스 미 국방장관 역시 “남북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주한미군 문제도 논의 의제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평화협정은 남북미 간 적대적 관계의 해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을 전제로 주둔하는 주한미군의 필요성은 당연히 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와 똑같은 주장을 펼친 문정인 특보는 조선일보 등 언론에 의해 ‘매국노’ 수준으로 비판받았으며 이는 주한미군 감축을 논의하는 것조차 터부시하는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안타깝게도 언론은 이러한 폐쇄성과 비민주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핵심 가치인 언론이라면 주한미군 관련 논의를 공론장으로 이끌어야 하고 평화협정이 가시화된 현 시점에서 그런 태도가 더욱 절실합니다. 뉴욕타임즈 발 보도를 속보로 받아쓰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역할들입니다. 

 

<끝> 
문의 이봉우 활동가(02-392-0181)  정리 엄재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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