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_
길을 잃은 노동존중 사회와 빈곤한 노동철학에 대해
김영훈(정의당 노동본부장)
등록 2019.11.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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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한겨레)            

 

10월22일 문재인대통령은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통해 국정후반기 기본구상을 밝혔다. 주요언론들은 ‘공정을 위한 개혁’이 문재인 정부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임기 절반을 경과한 현 시점에서 집권 초와 달라진 점은 대통령의 연설에 ‘노동존중 사회’ ‘소득주도 성장’ 등 노동관련 표현이 사라진 점이다. 실제로 시정연설에서 ‘노동’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취임 초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던 대통령 약속은 불과 2년 반 만에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수정한 것인가? 사라졌다면 무엇 때문이고, 수정했다면 그 방향은 어디인가?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 사회’라는 비전은 제시했지만 그에 걸 맞는 정부여당의 ‘내공’ 부족을 원인으로 분석한다. 본격적인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경제여건 속에 재벌과 유착된 언론 등 기득권세력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반 노동담론을 뚫고 일관되게 노동존중 사회를 밀고 나갈 철학과 전략이 부재했다는 지적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10월4일 정기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근로기준법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노동자유계약법 제정을 주장했다. 노동기본권을 인권으로 보지 않았던 베르사이유 조약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지만 문재인 정부 인사들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뛰어넘는 ‘노동존중 사회’에 대한 노동철학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노동철학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그람시는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특정 계급이 자신의 특수이익을 보편적인 이익으로 믿게 함’으로써 다른 계급을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하게 만드는 정치적 지적 도덕적 리더십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는 “삼성이 망하면 한국경제가 망한다.” 는 주장에 국민 대부분을 동의하게 만드는 재벌중심 성장 이데올로기이다. 

 

“정리해고를 해야 기업경쟁력이 살고 그래야 남은 일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은 1998년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이고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테러진압 특공대 투입이 정치적으로 용인된다. 

 

정부여당의 입장에서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쌍용차 해고자 복직, KTX승문제 문제 해결 등 이명박근혜 정부와 다른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가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지금 한국사회에서 노동기본권 강화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임금과 단체교섭 등 헌법적 권리인 노동기본권을 일정기간 유예해야하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지속가능한가? 다시 말해 시민들의 노조 할 권리를 포기해서라도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하는가? 생산의 주체이며 소비자이면서 납세자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생산현장에서 1차 분배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 상황에서 양질의 일자리(decent work)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노동기본권 보장을 일자리 문제 정도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으로 노동조합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고용원 또는 직원으로만 한정시키는 빈곤한 노동철학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무상급식 논란에서도 보았듯이 보편적 복지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공짜 점심’이 아니라 납세자인 국민이 자신이 낸 세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투쟁의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양질의’ 일자리는 자본가의 선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사가 갈등하고 논의하면서 인간다운 노동, 일자리의 질은 높여나가는 것이다. 나쁜 일자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나경원 의원 주장처럼 노동자가 사용자와 개별적으로 자유계약을 통해 시장에서 노동을 거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동, 화폐, 토지의 상품화가 초래한 시장전체주의의 야만성을 매일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한때 높은 복지수준을 자랑했던 나치독일이지만 노동조합과 파업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기본권을 부정하는 전체주의가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사회정의에 기초할 때만이 항구적인 세계평화가 가능하다.”고 천명했다. 동양철학으로 이야기 하자면 위민(爲民)이 아니라 여민(與民)정치로 사회구성원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무한대로 확장된 시장권력을 사회와 정치가 제어할 때 가능하다. 시장전체주의가 사회를 지배할 때 약자들끼리 무한경쟁이 공정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고 비정규직 고용이 일상회된 구조는 뒤로 한 채 투쟁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을 어려운 입사시험을 거부한 ‘무임승차자’로 낙인찍는다. 그러하기에 지금 우리에게 노동철학을 바로세우는 일은 단지 문재인 정부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우리 모두와 조직노동운동에게도 시급한 과제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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