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독감 백신 논란 일으킨 반과학적 보도

공포와 불안을 먹고 사는 언론
박영흠(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
등록 2020.11.0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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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exels)

 

‘전쟁은 언론에게 호재’라는 말이 있다. 생명과 안전이 위험할 때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눈과 귀가 언론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언론사 건물에 폭탄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전쟁만큼 언론이 장사하기 좋은 기회는 없다(걸프전을 안방에 생중계하면서 세계적인 뉴스전문채널로 성장한 CNN을 떠올려보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전쟁통에 신바람을 낸다니 끔찍한 이야기지만, 대중의 주목을 먹고 사는 언론의 생리가 그렇다.

 

어떤 언론에게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 세계적 유행’조차 ‘특수(特需)’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신종 감염증이 확산하는 국면은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시기이고, 평소 시사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뉴스를 열심히 찾아보기 때문이다. 물 만난 언론에게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사회는 좋은 낚시터다. 언론이 시민들의 생명과 공동체의 방역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극적인 제목과 과장된 보도로 공포 마케팅에 열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의 새로운 ‘떡밥’, 독감 백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언론이 이번엔 독감 백신이라는 새로운 ‘떡밥’을 들고 나왔다. ‘독감 백신 쇼크’, ‘독감 백신 공포 확산’, ‘백신 맞고 또 사망’, ‘[속보] 독감 백신 접종 후 사망, 엿새간 10명 사망’, ‘독감 백신인가 독성 백신인가’... 언론은 증가하는 사망자 수를 매일 중계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불안감을 극대화했다. 언론이 논란을 만들어내고, 언론 때문에 시민들이 불안을 느끼면 다시 그 불안을 핑계로 논란을 증폭시킨다.

 

‘현대문명의 성취’라 할 수 있는 백신의 안전성 여부는 이미 과학적 입증이 끝난 문제다.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믿든 안 믿든, 언론이 논란을 일으키든 말든 백신을 맞는 쪽이 더 안전하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단지 사망 전 백신 접종을 했다는 이유로 백신 접종이 사망의 직접적 이유인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시간적 선후 관계가 곧 인과관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걸 혼동하는 건 고3 학생들이 치르는 대입 논술시험에서도 범해서는 안 되는 가장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다. 한국 언론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백신 접종은 나를 지키는 행동인 동시에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는 행동이다. 백신을 접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집단면역이 가능해지면서 사회는 안전해지고, 거부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바이러스 전파가 활발해지면서 사회는 위험해진다. 언론이 과잉된 위험 인식을 부추겨 접종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방역 시스템이 위태로워진다. 공중보건과 사회적 연대를 붕괴시키는 반(反)사회적 행태다. 언론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지금은 장사의 기회가 아니다

 

언론은 늘 말한다. “우리는 팩트만 보도했다”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백신의 안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 아니냐는 주장이다. 무책임한 변명이다. 사회 공동체의 위기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언론은 객관적 사실을 전달했다는 알리바이 뒤에 숨을 수 없다.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truth beyond facts)을 찾으며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상황에 계절 독감까지 덮친다면 ‘감염병 동시 유행’이 우려되는 비상한 시점이다. 언론의 책임도 평상시와 같을 수 없다. 이럴 때 언론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파편화된 사실을 전달하고 시민들의 불안을 단순 중계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전문가를 통한 검증과 과거 데이터와의 비교를 거쳐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백신을 접종해야 안전해진다는 점을 단호하고 분명히 말해줘야 한다. 안전이 위협받고 불안이 증폭될 때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의사가 아닌 기자에게 과도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 사실을 전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게 기자의 본분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분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언론은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안전과 당면한 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이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유튜브와 SNS가 언론의 위상을 위협하고 역할을 대신하는 시대다. 시민들이 언론을 필요로 할 때 언론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시민들의 눈과 귀가 언론에 쏠려 있는 지금은 장사의 기회가 아니라 신뢰회복의 기회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지금이 언론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지 모른다.

 

*언론포커스는?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글입니다.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