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호] [여는글] 공영언론의 건투를 빕니다
등록 2019.01.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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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환경이 어지럽습니다. 우선 공영방송의 새로운 이사진에 지난 정권에서 언론을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수단화하여 문제가 되었던 이들이 소위 ‘야권 몫’이란 정치적 수단을 다시 활용해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애초 보수 정권 기간 동안 공영언론이 정치권에 종속된 근본적 이유가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정치권의 ‘몫 나누기’에 구조적 관행적으로 종속시켜 놨기 때문인데, 이번 이사진 선임 논란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근본적 구조를 정치로부터 확실하게 떼어 놓지 않는 한 문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제는 구조 변화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관심과 여론이 절실한데 불과 얼마 전 해직 언론인들을 향해 격려의 표시를 보내며 공영언론 정상화에 힘을 실어줬던 시민들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미온적입니다. ‘구조 변화’가 ‘인적 청산’과 달리 시민들에게 어렵고 복잡하며 직접적으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진 선임에 대한 뉴스가 해당 인물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헤드라인에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촛불을 통해 정권까지 바꿔줬으면 그 다음은 공영언론 스스로가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 즉 일종의 촛불 피로론이나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공영언론들에 대해 시민들이 갖는 애증 같은 정서적 이유로 전부를 설명하는 것 역시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공영언론이 정상화 된 이후 시민들이 기대한 것만큼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수 정권 시절 친정권적인 뉴스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시민들이 기대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기대한 ‘수준’은 무엇일까요? JTBC를 뛰어 넘는 무언가일까요? 아니면 팟캐스트들을 뛰어 넘는 무언가 일까요? 분명한 건 이를 위해 공영언론들이 뉴스를 포함한 각종 콘텐츠들을 보다 질 높게 만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무언가’가 잘 나오고 있지 않은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1분 1초의 트렌드를 가지고 다투는 미디어 생태계에서 10년의 시간은 엄청난 것입니다. 아무리 지난 시절 트렌드의 최선봉에 있었다고 해도, 혹은 가장 거대한 플랫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10년의 변화를 단숨에 따라잡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더해 최근의 미디어 상황과 매우 어울리지 않는 공영언론의 태생적 문제도 있습니다. ‘전파’를 ‘공공재’로 해서 등장한 공영언론은 채널과 플랫폼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지던 시절에 탄생한 매체입니다. 케이블에 이어 웹, 모바일까지 플랫폼이 무한 확장되어지는 현실에서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정체성인 셈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독점을 우려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각종 규제를 받고 있으니 무한 경쟁 상황에서 손발이 묶인 채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독점적 지위’가 부여한 우월성 또한 여전히 지니고 있다 보니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소위 ‘갑질 문제’가 정상화 이후에도 터져 나와 과도한 규제 때문에 억울하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는 공영언론의 미래를 비관하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립니다. 구조적 변화를 극복하긴 어렵기 때문에 결국 규모와 역할이 변화하고 축소될 거라는 전망인 셈입니다. 길게 보면 그런 전망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현재의 공영언론이 자신의 몫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시민들의 관심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함을 의미하지도 않고요.

결국 콘텐츠의 질적 향상에 시간이 걸린다면 좀 더 빠르게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우월적 지위를 통해 누리던 갑의 위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콘텐츠의 공영성 외에 공영언론 내부 구조의 공영성으로 시민들에게 우선 호소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미 그러한 노력들을 공영언론들이 하고는 있지만 시민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체감되어질 만큼 공격적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사실 공영언론을 비롯한 방송사들은 콘텐츠 생산에 있어 오랫동안 비정규직의 저임금에 의존해 왔습니다. 외주 제작사들의 낮은 제작 단가에 기대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은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영언론 정상화를 응원했던 시민들 중 혹 그 변화에 대해 다소 실망을 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극화라는 시대 상황, 그것이 발생시킨 시대정신에 가장 맞닿아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대 담론을 떠나 방송사 특히 공영언론의 갑질 논란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절규가 SNS에서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공영언론 정상화에 손뼉을 쳐주긴 쉽지 않습니다. 바뀌긴 뭐가 바뀌었냐는 비판적 댓글에 반박 댓글을 달 수 있는 ‘논거’가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피디 시절 모 중견 작가의 푸념 섞인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수년 동안 쉬지 않고 밤잠 설치며 열심히 일했고, 그 덕에 성과를 내어 소위 ‘잘 나가는’ 교양 작가가 되었는데 우연히 근로소득원천징수를 뗄 일이 있어 확인해 보니 연봉이 2천만원에 불과해 스스로 놀랐다는 이야기. 뜨끔해서 작가료를 조금이라도 올리려 애쓰긴 했지만 인상 수준이란 게 미미했고 프로그램 내용을 책으로 만들 때 피디 몫을 제외하고 대신 작가 몫을 올려주는 것으로 그나마 보완을 했었습니다. 엊그제 거의 십년전 책 인세 정산서가 메일로 왔습니다. 17쇄 인세였는데 작가들 인세가 여전히 적지 않더군요. 솔직히 그 당시엔 좀 멋져 보이고 싶은 욕망도 적지 않아 했던 선택인데 지금 보니 이유야 어쨌든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작가들이 생산한 좋은 결과물들이 이런 부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혁신적인 콘텐츠 역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화와 혁신에 몸부림치고 있는 공영언론의 건투를 빕니다.

 

여는글 김진혁(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