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신입활동가 인사] 두 번째 심장 소리가 들리나요
등록 2016.12.1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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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산티아고 대성당 오브라도이로 광장/인파가 그리는 어지러운 동선 속에/
나는 혼자 서서/한 점 배경으로 작아졌다/
매일 삼사십 킬로미터, 힘을 쏟아 걸은/길 끝/
나는 어떤 당신에게/이렇게 열심히 다가갔었는지/
생장에서 산티아고 팔백 킬로미터 거리가/
영이 되는 순간/멀고 먼 당신과의 거리를 생각한다/
별이 흐르는 길이라는 까미노/온 힘으로 걷고, 먹고, 자고, 얘기하는/
한 명 한 명 별들 사이에/캄캄해진 나를 탓한다/갈 곳 없는 거리에/시간은 같은 걸음으로 지나고/
어느새 첨탑에 걸린 노을이/별빛으로 올라가 나를 부른다/
다시 걸을 길이 남았다고/걸어야 한다고

 

 

민언련에 들어오기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한 달 동안 팔백 킬로미터를 걷는 긴 트레킹 코스였습니다. 앞에 쓴 시는 마지막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마음을 적은 습작입니다. 순례길을 걷고 나면 인생의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가서도 온종일 걷느라 바빴고, 걷는 동안에는 아픈 어깨 때문에 배낭을 고쳐 메고 발바닥을 달래며 걷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잠깐 아픔이 가시는 동안에는 ‘잃어버린 관계’를 생각하느라 또 정신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 심장


왜 순례길을 걸었냐고 누가 물어보면 ‘잃어버린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일반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산티아고로 떠났지만 떠난 이유는 그보다 전에 활동했던 ‘맥놀이’라는 단체에 있었습니다. ‘맥놀이’는 학교 선후배가 모여 만든 작은 인권연극단체였습니다. 자취하던 선배의 보증금을 빼고 각자 돈을 보태 얻은 월세방에서 대본 쓰고 연습하면서 연극을 올렸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월급 받은 사람이 있으면 그날은 ‘아구찜 대짜’같은 거창한 야식을 시켜놓고 밤새 술 먹고 토론을 했습니다.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던 ‘성 소수자’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 시절이었습니다. 한 선배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든 말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은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나는 이 ‘심장’에 함께하고 싶어.”

 

‘맥놀이’는 소수자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첫 번째 공간이자 관계였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이 사람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일반 회사 생활을 하게 된 이후 몇 년은 캄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캄캄한 시간이 더는 길어지면 안 되겠다 느꼈을 때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깨달은 것은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런 관계도 회복되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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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심장


한국에 돌아와서 파파이스를 듣다가 우연히 민언련을 알게 됐습니다. 공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지원하고 싶었지만, ‘언론에 대한 활동가’로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언론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격이었으면 망설이다 말았을 텐데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운 좋게 면접까지 보게 됐고 작은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신입 활동가 맞이 첫 회식에서 소감을 말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언론 민주주의는 제겐 너무 큰 말입니다. 그냥 여기 앉아 있는 모든 분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배우겠습니다”. 겸손의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배울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보고서와 씨름하느라 야근하면서도 실수가 나오지 않을까 몇 번씩 돌아보는 당신, 행사에서 혹시나 성차별이 발생하지 않을까 인원 배치를 다시 고민하는 당신, 회원과 밝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당신, 깃발을 꼭 쥐고 천천히 걸어가는 당신, 나열하기 어려운 수많은 ‘당신’이 있었습니다. 

 

그 한 명 한 명에게서 심장 박동이 들립니다. 민언련은 언론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내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두 번째 공간이 돼가고 있습니다. 저는 겁이 많아서 한 번에 한 걸음밖에는 걷지 못합니다. 지금도 이 옆에 앉아있는 열 명,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육천 명 ‘당신들’ 심장 소리에 기대서 천천히 또박또박 걷겠습니다.

 

안효광 홍보 담당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