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을호][회원의 날 참가기]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마음에 새겨진 두 글자
등록 2023.02.0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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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정태춘과 박은옥을 나보다 한 세대 전의 이름이라고 여겼다. 정태춘과 박은옥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가요 사전심의 폐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오랜만에 무대에 올랐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보기 전에는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인물의 이야기가 궁금하면서도 영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살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누구나 다 얼굴을 아는 유명한 대중가수가 늦은 나이에 청계피복노조와의 만남을 통해 사회운동에 눈을 뜨고, 전교조 해직 교사들을 위해 앞장서서 전국 대학을 돌며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공연하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벌금형을 선고받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두 사람은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음악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내내 오랫동안 멈춰 있는 둘의 노래가 다시 이어질 수 있을지, 그렇다면 둘의 음악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영화 상영 뒤에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눈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특히 ‘좌파 가수’라는 수식어가 싫지는 않냐는 질문에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좌파 가수’는 자랑스러운 수식어 아니냐”라고 대답했던 게 가장 인상 깊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신념을 간직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기에,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영화의 여운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돌아와 정태춘의 대표곡 중 하나인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었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라는 그 유명한 가사를 곱씹는다. 이 말은 누군가 바꿔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주체를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라는 단체명에도 들어간 그 이름. 때로는 너무 흔하게 쓰여서 별 느낌 없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저 높은 곳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에 비하면 무력한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름. 혼자서는 약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힘과 가능성을 간직한 존재들의 이름, 시민.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신념처럼 끝끝내 우리가 지켜야 할 이름, ‘시민’이라는 두 글자로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내 마음에 새겨졌다.

 

김경훈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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