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_
해직 44년 만에 9순 맞은 언론인 동아투위 윤활식 위원에게 꽃을 바친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등록 2019.01.09 18:17
조회 133

<민주언론시민연합,프레시안>에 보낸 글입니다.

 

2019년 1월 8일에 9순을 맞이한 한 언론인이 있다. 1930년에 태어난 그의 이름은 윤활식. 1975년 3월 17일은 그가 지난 44년 동안 단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온 날이다. 바로 그날 새벽 서울 광화문 사거리의 동아일보사 건물에서는 세계 언론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동아일보사가 신문과 함께 운영하던 동아방송의 차장이던 윤활식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자유언론 사수를 외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나는 폭도들에게 떠밀려 동아일보사 문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꽝’ 하고 정문 빗장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철제 셔터가 내려졌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열정을 바쳐 일해 온 동아방송과 나의 영원한 작별의 순간이었다. 이른 봄 새벽 거리는 유난히도 쌀쌀했다.”(윤활식, ‘감옥에서 맞은 딸의 결혼식’, <1975-유신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72쪽)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사 사주가 동원한 폭도 2백여 명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폭언을 들으며 거리로 쫓겨난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113명은 바로 그날 오후 태평로 신문회관(현재 프레스센터 자리)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후배들과 함께 흔쾌히 그 조직에 참여한 윤활식은 3월 29일 해임통지서를 받았다. 40대 중반의 가장으로서 4남매의 아버지인 그는 동아일보사 간부들의 회유에 따라 회사로 복귀했다면 안정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친의 가르침’에 따라 ‘정의와 불의가 맞설 때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단호히 그 유혹을 뿌리쳤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윤활식은 공휴일을 빼고 매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출근’했다. 동아투위 후배들과 함께 건물 정면 앞에 가로로 도열해서 한 시간 가량 부당해직에 항의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는 신문회관으로 행진해서 모임을 가진 뒤 동아일보사의 폭거를 알리는 유인물을 들고 종교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대학가를 찾아가 배포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그 일을 여러 달 동안 계속하다 보니 생계를 이어갈 일이 막막해졌다. 그래서 집행부는 시위와 집회를 시작한 뒤 6개월이 되는 날 “투쟁은 계속하되 가족을 위해 각자 일자리를 찾기로 하자”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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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봄 동아방송에 입사한 윤활식은 춘천교육대학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시간강사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투쟁의 정도’에 따라 동아투위 위원들을 4 등급으로 나누고는 ‘취업 절대 금지’, ‘국내외 자유로운 이동 금지’, ‘정보기관원의 미행과 감시’ 같은 조건들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초·중·고에 다니는 네 자녀의 교육 문제를 심각히 고민하는 윤활식에게, 제강회사에서 일하던 남동생이 파이프 가게를 내라고 권유했다. 그는 친지들에게서 가까스로 빌린 돈으로 가게를 열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서야 조금씩 기반이 다져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이루어냈다는 자부심, 가장으로서 어느 정도 책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뿌듯해졌다.”(같은 책, 80쪽). 그러나 그의 앞에는 해직에 못지않은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아투위가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서울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기념식을 갖고 발표한 ‘민권일지’가 발단이었다. <동아투위소식>에 실린 그 문건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제도언론’이 철저히 외면한 민주·인권 관련 120개 사건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긴급조치 9호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라 동아투위 위원장 안종필, 총무 홍종민, 그리고 위원 5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같은 해 연말, 동아투위는 가족과 민주인사 등 2백여명이 참석한 송년모임에서, 구속된 7명의 동지를 하루 속히 석방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고 그들의 근황을 소개한 <동아투위소식 송년 특집호>를 배포했다. 경찰은 그 일을 주도한 혐의로 윤활식과 이기중·성유보를 구속했다. 그들은 서대문구치소에서 이미 옥살이를 하고 있던 동지 7명에 합류했다.

 

“구속된 지 두 달쯤 되던 1979년 2월 24일, 그날은 딸아이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기상하자마자 홍종민 씨가 찾아와 ‘선배님, 축하합니다. 술 한 잔 하셔야지요’ 하며 감방에서 미리 발효시켜 만들었다는 사과술을 우유팩에 담아 건넸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평소부터 여러 모로 우리를 보살펴주던 J교도관이 찾아와 ‘윤 선생님, 오늘 하객이 8백명입니다. 제가 직접 다녀왔습니다. 민주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하고 소식을 전해주었다.”(같은 책, 82쪽)

 

윤활식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뒤 13일 만인 1979년 11월 8일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밥줄인 파이프 가게’는 이미 자본금이 많이 축나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일파가 일으킨 쿠데타 소식을 듣고 동아투위 동지 여러 명과 함께 피신한 윤활식이 한 달 남짓 뒤에 집에 돌아가 보니 가게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한 해 동안 빚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동아투위 후배의 제안에 따라 유망 업종으로 떠오르고 있던 알로에 가게를 차렸다. 신문로의 덕수초등학교 옆에 있던 그 가게는 한 동안 손님으로 북적거렸으나 미국에서 알로에 젤(주스)이 수입되면서 치명타를 맞고 말았다. 두 번이나 사업에 실패한 윤활식은 알로에 가게 자리에 ‘암스텔담’이라는 꽃집을 신장개업했다. 그러나 빚이 1,300만원으로 느는 바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집을 팔아 빚을 청산했다.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윤활식은 1984년 12월에 결성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현재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의장 송건호를 중심으로 한 언협은 제도언론에 맞서 월간지 <말>을 발간하면서 1986년에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함으로써 나라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윤활식은 1988년 5월, <한겨레신문> 창간사원이 되어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지 13년 만에 버젓한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다. 전무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는 1994년 3월 한겨레를 떠났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자리이자 내 모든 열정을 바쳤던 신문사를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나마 내가 열심히 지원했던 <한겨레 21>의 창간기념 리셉션까지 보고 떠나게 되어 위안이 되었다.”

 

윤활식은 ‘감옥에서 맞은 딸의 결혼식’이라는 글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 (···) 또다시 내 앞에 1975년과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신에게, 내 선친에게, 역사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큰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큰돈이라도 만져 보려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또 그런 잘못이 되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가 저지른 과거의 모든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혀야 한다.”(같은 책, 90쪽)

 

·덧붙이는 말: 동아투위는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매달 17일 오후 1시, 자유언론실천재단과 동아투위가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부근의 한 식당에서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오는 1월 17일에는 그 자리에서 윤활식 위원 9순 잔치를 조촐하게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