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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심의규정 개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박건식)
등록 2014.01.2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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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포커스] 방송심의규정 개정의 문제점

방송심의규정 개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박건식(MBC PD협회장)

 

필자가 방통심의규정 개정안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필자는 지난해 11월 21일 KBS <추적 60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판결의 전말’ 편에 대한 중징계 시도에 대해 항의 차원에서 심의위 전체회의를 방청하게 되었다. 프로그램 심의 전에 방송심의규정 개정안 보고가 있었는데, 사무처 직원의 입에서 ‘민족의 존엄성’,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 등의 용어가 튀어나왔다. 그 용어를 듣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한국 사회가 ‘쇼비니즘’과 ‘매카시즘’ 사회로 완전히 들어서려고 하고 있구나 하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공포감은 적중했다. 방통심의위는 속전속결로 은밀하게 개정안을 밀어붙이려 했다. 2013년 11월 27일에 개정안을 입안 예고한데 이어, 월요일인 12월 16일에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데 금요일인 12월 13일에야 인터넷에 공청회를 했다.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하면 바로 전날에 공지를 한 것으로 상식 밖의 처사였다. 

 

 

                           1월 23일, 민언련을 비롯한 언론단체들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김현정의 뉴스쇼 중징계'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방통심의위는 은밀하게 개정안을 밀어붙이려 했던가?

 

이번 방송심의규정 개정안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민족의 존엄성과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이었다. 특히, ‘민족의 존엄성(역사적 사실이나 위인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하거나, 조롱·희화화하여 폄훼하는 행위를 제한)’ 조항 도입은 한국 사회가  ‘쇼비니즘’ 사회로 진입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점에서 우려를 자아냈다. 더 큰 틀로 보면,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시작된 이념 전쟁이 방송 영역에까지 침투된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매카시즘과 공안 통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29조 2항의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 된다)도 눈에 띄었다.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은 정부가 2013년 11월 5일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하기로 심의 의결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황교안 법무장관은 “통합진보당은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해 방송이 권력을 비판할 경우, 헌법의 민주적 질서 위반으로 규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혹보도, 천안함 침몰 의혹 보도, 제주 해군 기지에 관련된 보도 등도 헌법의 민주적 질서에 위배되는 방송으로 규제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려는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최근 심의위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가 박창신 신부를 인터뷰한 것을 문제 삼아 징계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심의위원들은 박창신 신부를 인터뷰한 것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배한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이번 방송심의규정 개정은 국가주의와 쇼비니즘의 강화로 대변되는 개악으로 방송을 공안통치의 시녀로 삼는 장치로 활용하겠다는 시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로는 ‘민족의 존엄성’이고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이지만 그 실상은 ‘정권의 존엄성’이고, ‘정권의 기본질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정작 시민사회에서 독소조항이라며 폐지를 요청했던 조항들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현행 규정 안에서 개정이 절실한 것은 9조의 공정성 조항이다. 심의규정을 관할하는 방송법은 33조다. 이 중 33조 9항은 ‘보도·논평의 공정성·공공성에 관한 사항’으로 되어 있다. 분명히 ‘보도와 논평’에 국한하고 있다. 그런데, 방송심의규정은 보도·논평이 아니라 모든 ‘방송’에서 공정성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방송법의 위임한계를 벗어난 불법 조항이다. 공정성 조항은 보도‧논평으로 국한시켜 적용하는 게 방송법의 취지에 맞다. 그렇다면, 시사프로그램에 적용해왔던 공정성 심의는 모두 무효가 되는 셈이다.

 

방송심의규정 11조(방송은 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을 다룰 때에는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 되며, 이와 관련된 심층취재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역시 독소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일단 문장이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무조건 방송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기도 한다.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 무방하지 않느냐는 주장은 발을 딛기가 힘들다. 또한, ‘재판 중’이라는 용어가 1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라는 것인지, 대법원 판결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방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방송통신심의위가 KBS <추적 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무죄 판결의 전말’ 편과 2010년 MBC ‘미국산 쇠고기 수입보도’에 대한 1심 판결을 방송한 프로그램에 대해 징계를 내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 프로그램은 모두 1심 재판 직후에, 검찰이 항소하기도 전에 방송했지만, 심의위는 징계를 감행했다. 또한, ‘재판에 끼칠 영향’도 명시적인 정의도 없고 자의적인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헌적이다. 한편, 근거도 없이 무조건 ‘재판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법부 모독행위에 가깝다. 판사들은 증거와 대법원 판례에 따라 재판하기 때문이다.   
 
심의규정 11조는 원래 전문 재판관이 아닌 배심원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그리고 주로 범죄 보도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심의위는 범죄보도에 대한 문제는 눈을 감고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권력 비판 보도나 공적 담론의 영역을 규제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졌던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혐의보도는 물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논란 등에 대해서방송통신심의위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외눈박이’ 심의위란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권력 비판을 봉쇄하는 창구로만 악용되어 온 심의규정 11조는 전면 폐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행히 최근 방송통신심의위는 독소조항으로 지탄받던 ‘민족의 존엄성’ 조항은 스스로 철회했다. 그러나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은 신설을 강행해 공안심의, 정권보위심의로의 길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의 존엄성’ 조항 역시 때가 되면 다시 신설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에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