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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 속에 빠져버린 ‘숲의 진실’과 인권 (이완기)
등록 2013.11.0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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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 속에 빠져버린 ‘숲의 진실’과 인권



이완기(민언련 정책위원장)



“여기 워싱턴 갱에 대한 하수구의 폭로기사가 있습니다. 국무장관이 여덟살 때 저지른 비행을 하수구가 독점 취재했습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인 끝에 이제 국무장관의 유모가 직접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하수구가 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마틴 처즐위트의 생애와 모험>(The Life and Adventures of Martin Chuzzlewit)에서 뉴욕의 신문팔이 소년이 외치는 신문선전의 목소리다. 디킨스는 이 소설에서 미국신문의 저열한 폭로저널리즘을 하수구, 암살자, 염탐꾼 등에 빗대 비판했다.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의혹’ 보도는 ‘하수구 저널리즘’이라는 치욕스런 비판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저널리즘의 윤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한다.


조선일보의 지적대로 검찰총장은 우리나라 최고사정기관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된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 논리만으로 이번 조선일보의 ‘혼외자 의혹’ 보도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나무의 진실’을 넘어서 ‘숲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저널리즘의 사명과, 취재과정에서 저질러진 인권침해와 언론윤리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다면, 공중이 원하는 참된 ‘숲의 진실’과 인권은 하수구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조선일보의 의혹 보도가 시작된 시점은 ‘이석기 내란음모’, ‘NLL대화록 폐기’, ‘원전비리’, ‘국정원 댓글’ 등의 사건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공소유지가 진행되고 있는 때였다. 하나같이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사건들이며 이중에서도 ‘국정원 댓글사건’은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채 총장에 대한 의혹은, 채 총장이 비록 공인이지만 1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고 직무 연관성도 없다는 점에서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국한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를 들춰내는 모양은 기사의 양, 제목의 크기, 지면의 배치, 표현방식, 취재과정 등에서 상식의 틀을 많이 벗어나 있어 그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조선일보는 청와대, 국정원 등과의 커넥션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눈에 가시였던 채 총장을 임기 중에 끌어내림으로써 목표를 이뤘고, 이로써 ‘국정원 댓글사건’은 재판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게 됐고 국민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됐다.


채동욱 검찰총장 취임 이후로 채 총장 관련한 조선일보의 보도를 살펴보면 잘 짜여진 각본처럼 은근하고도 지속적인 청와대와의 교감을 느낄 수 있다. ‘혼외자 의혹’에 대한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나가기 전인 9월5일에 이중희 청와대 비서관과 김광수 공안2부장이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선일보는 9월18일자 김창균 정치담당 에디터 칼럼을 통해 “정치부장은 보도 전날 밤에야 관련 내용을 알았고 6층 관계자(조선일보의 고위층을 지칭)들은 아침신문을 통해 접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지난 9월 14일자 사설에서 지난 4월에 채 총장에 대한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섰다고 했다. 매일 보고받고 회의하고 토론하는 데스크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4월에 취재가 시작된 사건을 5개월이 지나도록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채동욱 찍어내기’의 징후는 그 동안 조선일보가 보도한 채 총장 관련 보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조선일보는 채 총장의 특별감찰 지시(6월15일자 4면), 천안함 방문(6월26일자 11면), 곽상도 전 민정수석의 교체(8월6일자 4면), 전방부대 방문(9월3일자 11면) 등을 국정원댓글사건과 연관 지으면서 채 총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잽을 계속 날렸다. 

8월29일자 <채동욱 검찰총장이 왕따가 된 이유는?>이라는 제목의 정권현 칼럼은 ‘채동욱 끌어내리기 예고편’의 결정판이다. 이 칼럼은 국정원 댓글사건과 관련해 채동욱을 국정혼란의 원인 제공자로 몰았고, 과거 총장지시를 어기고 잠적한 일화, 댓글수사에서 부하들에게 책임을 미뤘다는 검찰 내 시선, 검찰개혁에도 알맹이가 없는 것 등을 예로 들면서 비난을 쏟아냈다. 급기야 칼럼은 지난 정권의 비리수사나 재벌 때리는 일에는 기를 쓰고 달려들면서 불법집회, 폭력시위, 종북세력 척결 등 공안사건 앞에선 주눅이 든 모습과 NLL사초실종 사건에서 몸 사리기를 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해내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특정인에 대해 이처럼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이 어처구니없고 악의적인 칼럼이 나가고 8일 뒤인 9월6일에 조선일보의 ‘혼외자’ 관련된 첫 보도가 나갔다.

조선일보의 9월6일자 첫 보도는 취재준칙 및 보도의 기본원칙에서 한참 벗어났다. 조선일보는 표제와 부제로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숨겼다”, “11세 아들 8월말 美로 출국” 등 매우 단정적인 표현을 썼다. 당사자에게 반론이나 해명의 기회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밝혀졌다’, ‘확인됐다’, ‘알려졌다’ 등의 ‘수동형 서술’과 ‘Y씨 주변’, ‘Y씨의 한 지인’, ‘학교측 관계자’ 등 익명을 사용함으로써 주체와 출처를 알 수 없게 하는 간교함을 보였다. 조선의 이런 기사쓰기는 폭로의 대상을 흠집 내는 데는 더 없이 편리한 방식이지만 기사의 출처를 밝혀야 하는 취재준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진실로의 접근을 더 어렵게 한다.

조선일보의 이중적 잣대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사 사장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던 장자연 사건 때는 단순한 ‘의혹 보도’에도 소송 불사로 강력 대응했고, 이만의 전 환경부장관의 친자확인소송이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며 이 장관을 옹호했던 조선일보가 유독 채 총장의 경우에는 서슬 퍼런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 판단기준을 종잡을 수 없어 신뢰가 가질 않는다.

혼외자 채군의 출국일, 거주지, 혈액형, 학적부 기록 등은 일상적인 취재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취재 기자들이 주변 취재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보를 취득했다고 밝혔지만 당사자나 부모의 동의가 없는 정보취득과 정보유출은 불법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는 자체 조사를 통해 정보취득의 경위를 소상하게 밝히고 그 과정에서 법적‧윤리적 문제가 발생했다면 대국민 사과와 함께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한다. 그것이 언론의 정도를 지키는 길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보도의 가장 큰 폐해는 치유 불가능한 인권침해의 문제이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채군의 영상이 무차별적으로 회자되고 채군에게 부끄러운 내용이 조선일보에서 같은 반 동무의 인터뷰를 통해 인용보도 되면서 채군의 인권은 속절없이 유린되었다.

채동욱 ‘혼외자 의혹’은 아직까지 정황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얼마 전 Y씨 가정부의 인터뷰 기사가 TV조선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그 또한 제3자의 일방적 진술일 뿐이며 필적 감정 역시 과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을 비추어 볼 때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일이다.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전자 감식뿐이며 그 외의 어떤 진술이나 정황적 근거도 진실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균형성과 객관성을 잃고 흥분한 조선일보 보도는 그 취지와 배경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분명하고도 흔들릴 수 없는 증거가 없다면 결코 누구의 말도 믿지 말라”는 볼테르의 경구를 우리 언론이 되새겨야 할 때다. 더불어서 ‘분명하고도 흔들릴 수 없는 증거’가 설령 나온다 할지라도 ‘숲의 진실’과 인권이 하수구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