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_영화이야기|<수영장>, <여름의 조각들>, <영원한 여름>

여름이야기
등록 2018.08.20 18:10
조회 37

나는 
당신과
연결하고
있어요
지금도.

 

남자는 여자 오른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옅은 갈색 블라우스 위로 남자 한숨이 떨어졌다.
"그날 밤 우리 관계가 어그러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 
곧 여자는 남자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영원히 헤어질 사람처럼 한참을 울더니, 더 한참 포옹했다. 태양이 통째로 쏟아진 오후 텅 빈 거리 벤치에서 연인은 이별을 연습했다.
왕가위 감독 <화양연화>에서 미리 이별 연습을 하자며 흐느끼던 양조위와 장만옥이 생각나 나도 조금 슬펐다. 
불볕을 따라, 빗줄기를 타고, 여름은 감성이 흩어지는 계절이다.
폭염에 땀을 쏟고 몽롱한 심신은 메마를지언정 이 여름도 지나고 나면 또 그립겠구나 싶다.
그럴까 봐 거리를 쏘다니고 태양을 살피고 눈이 까끌까끌할 만큼 여름풀꽃을 실컷 담았지만, 저녁해가 차츰 줄어들고 밤바람에 미세한 가을이 섞이면서 괜스레 마음이 아쉽다.
뜨거웠던 2018년 여름이 똑딱똑딱 정수리를 막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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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2009년 일본, 감독 : 오오모리 미카 / 출연 : 코바야시 사토미‧모타이 마사코‧카세 료)

 

쿄코(코바야시 사토미)는 4년 전 가족을 떠나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 떠나버린 엄마를 만나기 위해 딸 사요가 찾아왔다. “엄마는 그때 왜 그렇게 우리를 떠나버렸어?” 쿄코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살아가는 데 우연이란 건 없어.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 가는 거야.” 사요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왜 엄마 혼자만 생각해? 내가 잘못될 수도 있었을 텐데.” 쿄코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잘못될 일이 있을까? 나는 너를 아는데. 그랬구나. 섭섭했구나.”


게스트하우스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사는 쿄코, 착한 품성을 지닌 청년 이치오(카세 료), 태국 소년 비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주인장 키쿠코(모타이 마사코)가 함께 산다. 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고요한 사색을 즐기며 계절이 빚은 사소한 일에 마음을 기울인다. 


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어울렸다. 원망을 안고 수영장에 찾아온 사요를 자연스럽게 대했다. 차츰 사요는 마음을 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는 게 좋아.”라고 말한 엄마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딸을 외면한 적 없다는 진심도. 오오모리 미카 감독은 개인이 좋아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정말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을 영화에 그렸다. 누구든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면 마침내 상처 입은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걸. 영화 내내 수영장 자체를 두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계절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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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조각들 (2009년 프랑스, 감독 : 올리비에 아사야스 / 출연 : 줄리엣 비노쉬․제레미 레니에․에디뜨 스꼽)

 

원제는 <여름의 시간들 Summer Hours>이다.


평생 미술작품과 고가구를 수집해온 어머니 엘렌(에디뜨 스꼽)은 75번째 생일에 자식들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집과 유산에 관한 이야기다.


프랑스 인상파 거장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상징주의 미술 선구자 오딜롱 르동이 그린 명화, 아르누보 양식 작가 루이 마조렐이 디자인한 마호가니 책상과 의자 등 남매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던 작품들이다. 어머니는 남매가 어린 시절 장난치다 깨뜨린 에드가 드가 조각품도 고스란히 간직했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큰 아들 프레데릭,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딸 아드리엔(줄리엣 비노쉬), 중국에서 새 사업을 준비하는 막내 제레미 세 남매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얼마 후 어머니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세 남매는 어머니 유산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각자 처지에 따라 유산을 보존하고 싶은 자식과 유산을 처분해 사업자금으로 활용하려는 자식. 예기치 못한 갈등은 우리 일상에서 여러 번 마주한 그것과 비슷하다. 어머니 유산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로 한다. 깨진 에드가 드가 발레 소녀 조각상은 전문가 손을 거쳐 복원했다.


이야기는 담담하게 흐르지만, 꽤 쓸쓸하다. 한때는 빛났던 흔적들이 옅어지고 흩어진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언젠가 사라지는 세상 이치를 막상 겪으니 안타깝고 서글프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한 영화답게 곳곳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활약했던 인상주의, 인상파 작가들이 그린 명작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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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여름 (2006년 대만, 감독 : 레스티 첸 / 출연 : 장효전․장예가․양기)

 

농구특기생으로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위샤우헝(장효전)과 국립대 입학을 목표로 삼은 모범생 캉정싱(장예가)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말썽꾸러기 위샤우헝의 수호천사를 맡은 캉정신은 그때부터 위샤우헝 곁에 머물며 우정을 쌓았다. 우정은 차츰 야릇한 감정으로 자라고, 자유로운 청춘 후이지아(양기)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서 관계는 더 미묘해졌다. "캉정신 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위샤우헝과 캉정싱은 영원히 친구로 남을 것인가. 사랑이란 감정을 선택해 결국 멀어지고 말 것인가. 


억눌렸던 사랑의 감정은 진즉 우정을 넘었건만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위샤우헝, 캉정싱, 후이지아 이들은 항성과 행성 그리고 혜성과 같다. 붙박이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항성.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 채 항성을 맴돌아야만 하는 행성. 이들을 스치며 지나는 찰나의 별빛 혜성. 슬픈 여름을 새긴 퀴어 멜로다.

 

 

김현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