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회원인터뷰]“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 2015.11.06 15:21
조회 530

 

[회원인터뷰_손성배 회원]

“아버지의 이름으로…”

 

 

 

 

만나는 장소는 삼성전자본관 앞이었다. 건물 전체가 통유리로 돼 있어 늦은 오후의 햇살이 지하 1층에 있는 카페까지 비추며 따스한 풍경을 만들었다. 삼성 건물 앞에서 표지 사진을 찍고 지하 1층 까페에서 인터뷰를 하러 본관 건물로 들어서는데, 삼성 보안요원이 앞을 막아섰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황하는 우리 앞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집회 참가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더니 이병국 회원을 지목했다. 그동안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관련 영상을 기록하던 병국 씨가 삼성에 ‘찍힌’ 것이다. 오늘 집회를 한 것도 아닌데, 삼성에 ‘찍힌’ 병국 씨는 삼성 건물에는 발도 못 들여놓는다. 그와 함께 서있는 나도 못 들어간다. 그제서야 건물 밖 곳곳에 설치된 CCTV와 보안요원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그리고 성배 씨가 싸우는 곳이 ‘삼성’이라는 거대권력이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유난히 바람이 차가웠다. - 글 유민지· 사진 이병국


손성배 회원의 첫 인상은 ‘열심히 사는 대학생’이었다. 2014년 초에 신문모니터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성배 씨는 시간을 빼곡히 채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매주 한번 분과 모임에 올 때는 꼼꼼히 모니터를 해오고, 기사도 프린트 해오는 등 적극적으로 임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사무실로 복귀한 어느 날, 삼성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손성배’라는 이름이 나왔다. 옆에 있던 조영수 처장에게 “기사에 성배 씨랑 똑같은 이름이 나왔네요. 성배 씨는 요즘 뭐하고 지내요?”했더니, “그거 성배 맞을 걸? 삼성전자 직업병 이야기 아니야?”라는 답이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장난끼 가득한 웃음 뒤에 숨어있는 성배 씨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됐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故 손경주의 아들

 


“아버지는 삼성반도체 화성사업장과 기흥사업장 내 협력업체 두 곳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하셨어요. 2003년부터 돌아가신 2012년 8월 31일까지, 햇수로 10년 동안 삼성반도체 협력사 소속 노동자셨죠.”
성배 씨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 손경주 씨는 ‘강골’, ‘날아다니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아버지가 2009년 3월경부터 몸이 안 좋다고 하시더니 그해 5월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아빠 형제 9남매 골수 검사를 다 했어요. 아래서부터 차례로 검사 했는데, 계속 안 맞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큰 아빠만 남으셨는데, 다행히 그게 맞았어요. 저흰 그때 ‘살았구나!’했죠.”
골수 이식을 받은 아버지는 점차 몸을 회복해 2010년에는 다시 복직했다. 그러다가 2011년 12월 다시 재발했다.
“그때 아빠가 정말 힘들어 하셨어요. 이 힘든 치료를 또 해야 한다니…. 그때 병원에 들어가셔서 나오지 못하고 돌아가신거죠. 그때쯤이었을꺼에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종란 노무사와 공유정옥 활동가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주면서 ‘내가 잘못되면 이곳에 전화를 꼭 해’라고 하셨대요.”
성배 씨는 아버지 삼우제를 마치고, 아버지가 적어주신 메모를 따라 반올림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글 쓰는 걸 좋아하셔서 가족 까페를 만들어서 이런저런 글을 많이 쓰셨어요. 백혈병 발병 이후에 아버지는 자신이 왜 아픈지 왜 백혈병에 걸렸는지에 대한 자료를 모으셨죠. 기필코 나아서 반올림에도 증언도 하고, 회사에도 이야기해서 왜 사람들이 아픈지, 왜 내가 아팠는지 밝혀보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돌아가셨으니 유언을 제가 따라야지요. 그런 마음으로 반올림에 갔어요.”
아버지는 까페에 산재신청 절차에 대해서도 적어놓으셨다. 성배 씨는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으나 유족급여 부지급 통보 공문을 받았다.


 “고인의 업무는 현장 소장 업무로써 유해화학물질의 노출빈도 및 노출수준이 낮고, 신청상병을 유발할 만큼 물리화학적 유해인자에 직접적으로 충분히 노출됐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업무와 관련해 발병 및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왜 아빠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나요?”
그러나 아버지가 까페에 남겨놓은 일기와 각종 자료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아버지가 인사만 관리하는 관리소장이었다면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이 낮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한 엔지니어가 라인 내에 서브룸에서 ‘지뢰게임’을 하다가 사장에게 걸렸어요. 그 건에 대해 아빠가 쓴 시말서가 까페에 남겨져 있는데, ‘정기적으로 출입하고, 수시로 들어가 순찰을 하고 직원들을 독려하겠다’고 쓰여 있어요. 아빠가 수시로 들어가셨고, 노출되신거죠.”
시말서 말고도 ‘셋업하는 인력들 대부분 화공약품과 노출되는 가스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셋업을 진행했다. 12라인 초기 셋업시 PM품질 향상을 위해 협력사 대표는 물론 관리소장이 8시간 이상 매일 상주하면서 관리했고, 관리소장은 근무 중에 대부분을 관리측면에서 라인 내 현장을 상시 상주하거나 패트롤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아버지의 자료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빠가 써놓은 글이 없었다면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신청 안 받아 줬을때, 저는 그냥 포기했을 거예요. 그리고 보상위원회에 전화해서 신청하고 끝냈겠죠. 그런데 아빠가 써놓은 글을 갖고 제가 얘기를 하는데, 그들이 자꾸 아빠의 기록이 거짓이라고 해요. 왜 우리 아빠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요.”
성배 씨는 근로복지공단을 피고로 행정소송을 냈다. 또 긴 싸움이 될 것이다. 10월 21일  <삼성전자 반도체 보상 30명 완료…직업병 해결 급물살>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삼성전자가 질병 피해와 관련된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고, 보상 대상자 상당수가 신청을 마쳐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삼성 백혈병’ 문제가 ‘해결국면’에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꼼수’가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당초 ‘삼성 백혈병’ 문제가 해결되길 희망한다면서 반올림과 협상을 시작했다. 반올림이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의제로 제시하자 삼성은 돌연 ‘반올림은 실체가 없다’면서 ‘발병자들과 이야기 하겠다’고 통보하며 파행을 거듭했다. 이후 조정위원회가 구성돼 “사회적 해결을 위한 사회적 기구(공익법인)에서 ‘보상’과 ‘대책’을 논의한다”는 권고안을 제시하자, 삼성전자는 공익법인 설립을 반대하며 돌연 사내에 보상위원회를 따로 만들었다. 사회적 해결과 재발방지 대책을 버려둔 채 개개별 보상으로 상황을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일부 피해 가족(가족대책위)도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자 한명이 개인적 사유로 아픈 게 아니잖아요. 그 공장에서 분명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슷한 병명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어요. 작업환경의 문제죠. 그런데 개개별로 보상받고 땡치면 되나요?”
언론들은 일제히 삼성의 보상을 치켜세우면서 반올림을 공격했다. 반올림이 피해자 가족을 볼모로 삼고 있다는 주장을 하거나 반올림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외부단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저는 반올림에 정말 고마워요. 반올림이 없었다면, 누가 이렇게 많은 자료를 모아 삼성에 싸웠을까요? 개개인은 힘이 없잖아요. ‘반올림이 독단적으로 한다’고 비난하는데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가족들 다 모아놓고 의견을 들어요. 그런데 쓰레기 같은 언론들이 반올림한테 ‘몽니를 놓는다’하고, ‘이용하고 있다’하니 화가 나죠. 이게 언론인가 싶고….”

 

 

아버지와의 약속, 아버지의 유산
성배 씨는 ‘동생과 엄마 앞에선 울지말라’고 했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례식장에서도 울음을 참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땐 ‘아빠카드’를 들고 막 쓰고 다니던 성배 씨는, 시간을 꽉 채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신 게 유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빠가 지금 계셨으면, 저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의존적으로 살았을 텐데, 안계시니까 제가 스스로 결정하고, 좀 자주적으로 살게됐죠.”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의 에피소드와 아쉬움을 얘기하던 성배 씨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허공을 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너무 힘든 순간들이 있어요. 살아계셨으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이렇게 나오지 않았겠죠? 아빠 직장 동료였으면서 완전 딴소리했던 사람들,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그랬겠냐고요.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많이 얘기하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상이 변했다. 아버지가 다녔던 공장 앞에 서자, 처음으로 그 곳 공기가 역겹게 느껴졌다고 했다. 어제까지 아버지와 어울렸던 동료 아저씨의 배신, 아버지를 괴롭히던 상사 아저씨의 실체를 알고나자 사람들 얼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올라오듯 입밖으로 말을 꺼내기도 힘겨워한다. 그렇지만 성배 씨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삼성의 문제를 또 얘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성배씨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을까?
“아니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전 허무주의에 빠졌어요. 반올림에 간 것도 아버지 유언이니까 그냥 유족으로서만 갔던 거지, 거기서 뭘 하려고 했던 건 없었어요. 저 민언련 가고 나서부터 변했어요.”
2014년 글을 더 잘 써보려고 ‘글쓰기 강좌’를 신청하고, 언론스터디라고 생각하고 ‘신문모니터 분과 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아무 생각없이 갔는데, 그곳에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제가 몰랐던 걸, 생각하지 못했던 걸 가르쳐주고 나누는 곳이에요. 또 특별언론학교를 들었는데, 강사님들이 전해준 이야기와 책 소개가 정말 와 닿았어요. 『소금꽃 나무』,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한쪽 눈을 감고 살았구나. 여기서 내가 이제 두눈을 갖게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혀가 굳어버린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 기자
어렸을 때부터 성배 씨의 꿈은 기자였다. 18년 전에 만든 초등학교 문집에도 성배 씨의 꿈은 ‘기자’라고 적혀 있단다.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스터디를 하고, 언론사 인턴 면접도 보고 있지만, 적당히 타협하는 기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언론스터디 할 때 제가 글 쓴걸 보고, ‘이렇게 세게 쓰면 취직은 안될꺼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저는 ‘거긴 안가요’라고 답하죠. 조선일보 인턴을 두 번 지원했는데, 두 번 다 서류를 붙고 면접을 봤어요. 면접장에서 ‘대학생들이 왜 한겨레를 좋아하고 조선을 싫어하냐’고 묻길래, 조선일보의 편파보도 사례를 말했어요. 그랬더니 ‘오해에요’ 하고 말더라구요.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만약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고도 인턴을 뽑아주면, 그 안이 어떤지 내 눈으로 보겠다고 인턴 지원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죠.”
요즘 18년동안 한번도 변하지 않았던 꿈이 흔들린다.
“기자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걸 쓰는 건 아니더라고요. 기계처럼, 직장인처럼 기사를 쓰는 거죠. 그래서 내가 왜 기자가 하고 싶은 건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요.”
성배 씨가 만난 기자들 중에 담고 싶은 모습이 있다.
“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어요. 인터뷰 하면서 잘 정리가 안돼서 횡설수설 했는데, 기사가 나온 걸 보니, 제 머릿속에 들어가서 한번 훑고 지나간 것같이 쓰여있더라고요.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와그너라는 기자와도 인터뷰 했었는데, 그 분 할머니도 백색가전을 벤젠으로 닦다가 백혈병에 걸려 돌아가셨더라고요. 저도 혀가 굳어서 자기 얘기를 못하는 사람들, 일하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그게 기자의 역할 아닐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성배 씨는 강남역 8번출구 앞에서 반올림이 진행하는 ‘삼성반도체 직업병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매일 24시간 이어 말하기’ 노숙농성장을 찾았다. 성배 씨는 마이크를 들어 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삼성반도체 화성사업장 내 협력업체, 기흥사업장 내 협력업체 두 곳에서 일하시다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손경주 아들 손성배입니다.”

 

 

성배 씨의 이야기가 퍼지는 농성장에는 반올림에서 상임활동가로 있는 임자운 회원 등 민언련 사람들이 보였다. 이종란 노무사에게 민언련 활동가라며 인사를 건네자 “민언련이 이렇게 큰 조직인줄 몰랐다”며 “죄다 민언련 회원이라고 한다”고 웃었다. 내 어깨가 으쓱하다. 소중하고 고마운 민언련의 자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