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_
‘신 브레턴우즈 체제’ 관련 조선일보 보도에 대한 논평(2008.10.23)
등록 2013.09.25 12:00
조회 340

 

조선일보, ‘친미’ 버리고 미국과 ‘맞장’?

.................................................................................................................................................

 

오늘(23일) 우리는 조선일보의 경제 관련 기사 두 건을 접하며 더할 수 없이 놀랐다.
설마 조선일보가 ‘친미’를 포기하고 미국과 ‘맞장뜨기’에 나선 것인가? 아니면 경제위기 상황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인가? 조선일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늘 신문을 편집한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첫 번째 기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신 브레턴우즈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2면 보도다.
기사의 제목은 <“북한 김정일체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現금융위기, 한국 선진국 오를 기회도 돼”>.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은 또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세계적인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신(新) 브레턴우즈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 대해 ‘IMF나 세계은행 등 여러 국제기구가 있지만 새로운 금융거래환경에서는 현재 있는 체제를 대개혁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기구를 만들든지, 보완을 해야 할 시점에 온 것만은 틀림없다’고 공감을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이 “우리가 새로운 국제기구를 만들 때에는 신흥국가의 여러 나라가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며 미국의 경제 패권을 부정하는 발언까지 그대로 보도했다.

두 번째 기사는 30면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의 특별기고 <새 금융시스템, 全지구적 통제 필요>다. 알려진 바와 같이 브라운 총리는 이른바 ‘신 브레턴우즈 체제’를 추진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글에서 브라운 총리는 “전후의 국제 금융체제는 수명을 다했다”고 단언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신뢰가 붕괴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금융 체제는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난주 유럽 지도자들이 만나서 신(新)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체제의 토대가 될 기본 원칙들을 제안했다. 투명성, 건전한 금융, 책임감, 도덕성, 그리고 전 지구적 통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 원칙들을 구현할 수 있는 시급한 결정들을 내림으로써 현 위기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무책임하고 은폐된 대출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이를 위해 국경을 초월한 금융기관 감독 체계, 그리고 회계와 규제에 관한 세계 공동의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미국 중심의 국제금융시스템을 대체하려는 유럽 지도자들의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칼럼 마지막 문단에서 브라운 총리는 “앞으로 몇 주 안에 우리는 이러한 의지와 협력정신으로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룰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2008년은 금융위기를 겪은 해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라며 미국의 경제패권이 종식될 것을 기대하는 듯한 말로 글을 맺었다.

다른 신문도 아닌 조선일보가 이런 기사들을 싣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다.
이른바 ‘신(新)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들자는 주장은 2차대전 이래 미국의 세계 경제패권을 뒷받침했던 IMF(국제통화기금)와 IBRD(세계은행)를 대체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IMF와 IBRD를 폐지하고 미국식 금융시스템과 다른 새로운 원칙에 입각한 국제금융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미국 달러화 중심의 국제금융질서 자체가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주 대륙은 미국 달러화, 유럽은 유로화, 아시아는 일본 엔화나 중국 위앤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블록경제권으로 전 세계 경제질서가 재편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금융위기를 계기로 자국의 경제패권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유럽 발 ‘신 브레턴우즈 체제’ 구축론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22일 경제전문지 머니투데이 기사 <친미로 뽑힌 MB, 금융은 탈미?>는 이명박 대통령의 ‘신 브레턴우즈 체제 필요성 공감’ 발언의 파장을 잘 분석하고 있다.
이 기사는 “IMF의 폐지와 대체기구의 창설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 상실’을 가속시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또 “대선 전부터 한국과 미국의 ‘혈맹 관계’를 강조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IMF 대체론’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역설적”이라면서 “‘IMF, WB 등 현 금융체제를 대개혁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자칫 미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와대는 22일 급히 ‘신 브레턴우즈 체제 필요성 공감’ 운운한 이명박 대통령의 <르 피가로> 인터뷰 내용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프레시안, 데일리서프 등 인터넷 신문들에 따르면 청와대 대변인실 관계자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유럽에서 제기되고 있는 신(新) 브레튼우즈 체제에 동참하겠다는 이야기를 이 대통령이 직접 하지는 않았다”, “IMF 개편, 신브레튼우즈 체제, 신흥국 연대 등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이를 ‘신브레튼우즈 체제 동의’로 한정하여, 대통령의 발언으로까지 인용 보도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정작 ‘친이명박 신문’이자 ‘친미신문’인 조선일보가 청와대가 부인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기정사실로 기사화하고, 고든 브라운 총리의 ‘신 브레턴우즈 체제 역설’ 기고를 실어준 것이다.
만약 미국의 경제패권을 비판해 왔던 매체들이나 진보진영 인사들이 ‘신(新) 브레턴우즈 체제 동참’을 역설했다면 이해가 간다. 그런데 ‘친미신문’ 조선일보가 ‘신 브레턴우즈 체제 동참’에 힘을 싣는 편집을 하고 나섰으니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일보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조선일보는 현재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르 피가로> 인터뷰 내용을 기사화하고 고든 브라운 총리의 특별 기고를 실은 것인가? ‘신 브레턴우즈’ 체제의 의미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명박 대통령 발언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신 브레턴우즈 체제 띄우기’의 선봉에 나선 것인가?
솔직히 우리는 미국 중심의 금융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하는 데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큰 힘을 갖고 있지 못한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이 먼저 나서며 ‘신 브레턴우즈 체제 참가’를 공언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우려된다.
하물며 ‘보수’의 시각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의 ‘신 브레턴우즈 지지’ 발언에 긴장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본다. 전 세계적인 대격변기에서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는 미국이든 유럽이든 중국이든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이러한 점까지 모두 고려한 후 오늘 기사를 실은 것인지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얼마 전까지도 ‘산업은행 민영화 추진’을 주장하면서 세계 각국의 금융위기 대응과는 동떨어진 요구를 했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한국 경제위기 보도에 반발하지 않았는가? 이러니 도대체 지금 조선일보가 무슨 생각으로 경제 기사를 쓰는 것인지 불안한 것이며, 오직 이명박 정권의 ‘힘 실어주기’를 기준으로 지면을 편집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대통령과 경제 관료의 정제되지 않은 오락가락 발언 때문에 한국 정부의 경제 위기 관리 능력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극대화되었다. 주식시장의 ‘셀 코리아’ 바람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정신없어 보이는 경제보도가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조선일보에게 진심으로 촉구한다. 조선일보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친미신문’의 정체성을 버리고 ‘신 브레턴우즈 체제’를 지지하고 추동하기로 작정했다면 새로운 세계금융질서로 나아가는 현실 가능한 경로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변화된 기조에 맞는 일관된 경제 기사를 써주기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제발 경제 문제에서 손을 좀 떼 주었으면 좋겠다. <끝>



2008년 10월 23일

(사) 민주언론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