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대안언론을 주류 언론으로! (김서중)
등록 2015.02.0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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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포커스] 새로운 언론운동의 패러다임 제안 

대안언론을 주류 언론으로!




김서중(성공회대 교수, 민언련 정책위원장) 



죽은 권력은 비판. 산 권력은?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의 진실성 여부를 두고 곳곳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당시부터 정부가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누누이 지적했음에도 대다수 언론은 이를 무시했고, 결과적으로 다수의 대중은 무지했다. 당시의 대다수 언론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전달하지 않았을까. 몰랐으면 무능한 거고, 알았으면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이다. 


당시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고 올바른 여론이 형성됐으면 하는 만시지탄은 접어 두고 현재로 돌아와 보자. 오류는 반복되고 있다. 죽은 권력은 비판하지만 산 권력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국정원, 사이버상의 선거개입, 국정농단에서부터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기레기’라 비난을 받는 언론들이 보여 온 보도 행태가 이를 입증한다. 


이런 언론들을 맹신하는 수용자도 존재하지만, 문제점을 깨닫는 수용자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렇다고 기존 언론에 비판적인 수용자가 늘고 있음에 마냥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기존 주류 언론에 실망하는 수용자들이 진실을 전달하는 대안 언론을 열심히 찾기보다는 외려 대부분의 언론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 홍보방송으로 전락한 공영방송, 종북을 팔아 생존하는 상업적 정치 언론 종편, 기존의 권위조차 내팽개치는 수구 언론 등에 대한 실망이 언론 자체에 대한 실망과 신뢰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언론의 신뢰 상실과 정치 허무주의 


언론에 대한 신뢰 상실은 정보 자체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도 이어지고 있다. 정보의 옥석을 가려 추구하기보다는 기존 언론으로부터 전달되는 정보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이 늘었다. 정보 허무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정보로부터 멀어지는 시민의 모습을 반기는 것은 기득권 집단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SNS에 있다. 한때 기존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인 즉 시민이 소통의 중심에 서는 정보 민주주의의 총아로 주목받았던 SNS는 개인화, 상업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 틈새를 비집고 기득권 집단은 SNS를 정치 선동의 장으로 악용하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같은 국민적 참사를 두고서도 재미작가 이름으로 유족들을 욕보이고, 악선전으로 세월호 참사를 승화시키려는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언론에 대한 실망, 정보에 대한 불신 그리고 퇴행적 커뮤니케이션 등은 정치적 허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득권 집단이다.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실망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의욕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기존 언론에 대한 비판에서 머물고 진리,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정치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대안언론의 존재 



뉴스타파, 오마이뉴스, 국민TV, 프레시안 로고. 이외에도 다양한 대안언론이 생겨나고 있다.


1970~80년대는 참으로 암울했다. 주류언론만 장악하면 일반인들은 진실에 접근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 암울한 시절을 경험했던 노년층이 보수화된 것은 설사 당시 체제가 독재인 것에 비판적이었더라도 다른 진실에는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언론들은 정치적 독재에 대해서도 비판을 못 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서도 기득권 논리를 확산시켰고, 노년층들은 그때 흡수한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아직도 믿고 있다. 지금도 ‘독재는 했지만, 독재자가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현재는 주류 언론들에 실망한 수용자들이 소위 대안언론을 접할 기회가 있다. 그 점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대안언론이 존재할 뿐, 대안언론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다. 주류 언론을 대체할 대안언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은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거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대안언론을 주류언론으로 


이제 우리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의 대안언론은 소수자 언론이 아니다. 기존 언론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만, 미처 못 다루는 부분을 메꿔주는 보완적 언론이 아니다. 우리 사회 존재 조건을 고려할 때 대안 언론은 다루는 내용의 범위와 그 질만을 놓고 봐도 불구상태인 기존 언론을 대신할 새로운 ‘주류 언론’이다. 단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주류 즉 진보 개혁 진영이 소비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흔히 계급에 반하는 투표가 사회 변화를 어렵게 한다고 한다.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언론소비를 하고 있다. 아니, 자신의 계급에 부응하는 언론 소비를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수용하지 않는 수용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지금의 대안언론들은 수용자가 존재 자체를 인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알리고 있는지,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수용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수용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대안언론들 공동의 노력이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 부분의 보완이 필요하다. 


그래도 수용자들의 노력은 중요하다. 우리 시대의 어른 채현국 선생께서 젊은이들에게 ‘노인을 봐주지 마라’고 일갈한 진정한 의미는 젊은이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의 비판대상인 노인들처럼 될 것이라는 경고라고 한다. 그 교훈은 기존의 언론에 실망하고 비판만 하면서 좋은 언론을 찾아 소비하지 않는 우리에게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주류언론에 실망하고 있는 다수가 지금의 대안언론을 수용하면 대안언론은 소수언론이 아니라 주류언론이 될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대안언론이 주류언론이 되는 것. 그게 정치 변화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