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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도로 은폐 시도, 더 이상 못 숨기자 본질 왜곡하며 물타기(엄주웅)
등록 2015.07.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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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국정원 해킹 보도로 드러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

무보도로 은폐 시도, 더 이상 못 숨기자 본질 왜곡하며 물타기 



엄주웅(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 상임위원)



  베일에 겹겹이 싸여 취재 자체가 어려운 사건이라면 또 모르겠다. 비록 방대한 양이긴 하지만 7월 초부터 이탈리아 해킹 전문업체의 내부 문서가 해킹당해 인터넷에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그러자 다음에는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자료 가운데 이메일들을 모아 친절하게도 검색기능을 붙여 공개했다. 해킹업체가 만든 불법감청 프로그램인 ‘RCS’의 거래처 가운데 한국의 ‘5163’부대라는 곳이 있다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은폐!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던 것 마냥 모른 척

  더 상세한 정보도 시간과 끈기만 있으면 취재하기 어렵지 않았다. ‘5163부대’가 어딘지, 그곳이 국정원이라면 왜 그런 이름을 썼는지, 국정원이 산 프로그램은 어떤 것인지, 언제 얼마나 샀고, 왜 샀는지 그리고 어디다 사용했는지 등 꼬리를 무는 의문도 자료를 뒤지면 일차적 사실이 다 나온다. 불법도청, 간첩조작, 선거개입 등등 잊기 힘든 최근의 ‘흑역사’를 지닌 국정원이니만치 뉴스 가치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한동안 침묵했다. 

  이번에도 블로그와 SNS가 역할을 대신했다. IT 전문지와 온라인 매체에 실린 기사가 퍼날라지며 SNS를 달구자 7월 10일경부터 주류언론들도 국정원 관련 의혹을 다루기 시작했다. JTBC와 한겨레를 필두로 국정원이 RCS를 국내 민간인 사찰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집중적으로 보도됐다. 이른바 ‘단독 보도’ 경쟁이 붙었다. 이때 특종이란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개된 자료가 있으니 다른 매체와 차별적으로 검색하고 분석하면 되는 법이었다. 심지어 동아일보조차 <외신이 거래 폭로하자 “서버 옮겨라”, “국정원 伊 해킹팀 접촉사실 작년부터 은폐 시도”>(17일, 5면)라는 제목으로 ’단독‘보도를 냈다. 그러나 ‘조중동’ 등 우익신문과 종편 채널들(JTBC 제외)은 7월 14일까지 관련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11일 <伊 해킹 프로그램 업체 고객명단 유출 ‘서울 서초구 5163부대, 8억원어치 구매’>를 보도했으나 15일에야 후속 보도를 했다. 중앙일보는 14일, 동아일보는 15일에야 관련 내용을 처음 보도했다. TV조선과 채널A는 내내 침묵하다가 7월 14일 저녁종합뉴스에서 겨우 말문을 열었지만 고작 한 꼭지씩만 보도하는데 그쳤다. 


왜곡, 국정원 해명만 앞세우거나, 야당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우기기

  파문이 확산된 후에야 “국내사찰용은 아니라”고 한 국정원의 해명을 앞세워 전한 다음, 이 문제를 놓고 벌어진 여야 간의 정쟁을 부각해 보도했다. RCS가 무엇인지, 왜 문제가 되는지 등의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이들의 보도를 통해서는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이런 보도 행태가 일부 우익 매체에만 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편이야 국정원 관련이니 그럴 만하다 싶은데, 언필칭 공영이니 국민의 방송 운운하는 지상파 방송까지 똑같이 답습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7월 10일부터 16일까지 방송사의 국정원 해킹 관련 보도량을 보면 MBC, SBS, 채널A가 각 각 3건, KBS가 3.5건, TV조선이 5건, JTBC가 31건을 보도했다. 지상파 3사는 보수적 종편보보도보다 보도량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도를 얼마나 주요하게 배치했는지 비교해도 1~5번째 배치된 보도가 JTBC 16건인데 비해서, 채널A와 SBS가 각 3건, TV조선이 1건이다. KBS와 MBC는 단 한건도 1~5건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 7월 14일 KBS <뉴스 9> 화면 갈무리


  그리고 사안 자체를 조명하기보다는 여야간 정쟁이라는 틀에서 뉴스를 다뤘다. MBC <뉴스데스크>의 리포트 제목은 <진상조사위 구성..“정치 공세다”>(15일), <여야 해킹 공방..“사용기록 공개”>(16일)이다. KBS <뉴스9>의 제목도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구입...“북 대비용”>(14일), <“87개 외국 IP에 사용”..대상은?>(15일)이다. SBS도 마찬가지이다. 지상파 보도는 제목만 보더라도 TV조선 <뉴스쇼판> <"해킹 프로그램 구입…국민에게 쓴 적 없다">(14일), 채널A <종합뉴스>의 <국정원 "해킹SW 구입…북 테러 대비">과 오십보백보이다. 거의 대부분 국정원과 정부 측의 입장을 먼저 전하거나, 이번 사안을 야당의 일방적 공세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식의 보도는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만일 주요한 정보를 TV에 의존해 획득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의 문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야 정쟁의 또 다른 소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과 부인하는 쪽의 대립이 전제되므로 뉴스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이 미덕이 되고, 뉴스를 보는 사람은 늘상 싸우는 모습에 신물이 나게 된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 나 몰라라, 국정원 나팔수 된 공영방송의 현실

  한편 이들 방송사에는 리포트 나열식 메인뉴스의 한계를 보강하기 위한 시사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에서도 관련보도라곤 7월 15일 RCS 해킹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를 소개한 KBS <시사진단>의 한 건밖에 없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사안에 그치지 않는다. 국정원이 불법감청 프로그램을 구매해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수한 의문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국민의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진상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정파적 언론이 아닌 공영방송이라면 당연한 책무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를 ‘정쟁’이라는 프레임에 넣어 보도하는 태도는 어떤 정치적 중립성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적어도 이번 국정원 해킹 관련 방송 보도는 극우적 성향의 종편채널과 차별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과연 이들에게 ‘공영’이란 우산을 씌워놓고 수신료 인상을 거론할 필요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7월 18일 국정원의 RCS 운영 실무 직원이 자살하자 드디어 관련 리포트는 메인뉴스 톱으로 올라왔다. 다음날 KBS <뉴스9>는 뉴스 도입부의 주요뉴스 모음에서 <“내국인 사찰 없어”…해킹 의혹 공방 가열>라고 전한 뒤, 해당직원이 남기 유서의 내용을 보도했다. 사람이 죽어야 톱뉴스가 되는가 싶어 개탄스럽긴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진실이 덥힐까 걱정되는 건 그동안 국정원 관련 보도를 접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