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당신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정의의 초대장이 될 것입니다”(2014년 10호)
등록 2014.10.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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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정의의 초대장이 될 것입니다”


글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ㆍ민언련 전 상임대표



  뭐라고 불러야할까요? 성유보 이사장님, 성유보 위원장님, 성유보 위원님…


눈 감으면 떠오릅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 1985년 2월, 공덕동 말지 사무실. 낡은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눈을 반쯤 감은 듯 뜬 듯 웃음을 머금은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제게 오랫동안 당신은 성유보 국장님이었고 민언련 이사장님이셨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소탈해서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지만 민주주의자로서 원칙을 지킬 땐 누구보다 단호한 분이었습니다.


눈 감으면 또 떠오릅니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의 서슬이 퍼랬던 시절, 민통련이 강제 폐쇄되고 바야흐로 6월 항쟁의 전조가 시작되던 어느 날 도피 중이던 당신이 종로2가에서 시위주동을 할 때 모습이 떠오릅니다. 내로라하는 민주화투사들의 일장연설과 군중을 호령했던 목청에 익숙한 우리에게 당신은 외쳤습니다. 백골단 형사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서론 본론 결론 없이 다짜고짜 외쳤습니다.

 “노래하나 부르시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고 시위대는 낮게 ‘농민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여……”

시위주동자가 아무 구호도 외치지 않고 노래하나 부르라고 하는 기이한 장면이었는데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요. 아, 그 순간 당신은 우리들 가슴속에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당신과 수도 없이 논쟁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당신께 대들었습니다. 6월 항쟁 때 주 구호를 직선제 개헌이냐 3민 헌법이냐 제헌의회로 할 것이냐, 혹은 안티조선운동이 점잖은 운동인가 아닌가, 그야말로 침을 튀기며 몇날며칠 논쟁했습니다. 6월 항쟁 때 저는 삼민헌법을 주장해 별명이 ‘삼민희’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로 조직 명칭을 정하고 직선제개헌을 주 슬로건으로 가야한다고 하셨지요. 안티조선운동은 당신의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민언련의 핵심운동으로 진수했었고요. 1985년 청담동 고급빌라에서 처음 본 비데를 놓고 세수용이냐 작은 변기냐를 놓고 당신과 격한 토론을 벌였던 적도 있었어요. 큰 주제건 작은 주제건 어느 순간에도 당신은 진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행동하다 보면 정답이 드러난다’며 ‘한번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실천 앞에 망설임이 없었고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85년 2월 처음 성 이사장님을 만나 30년 가까이를 언론정상화 현장에서 함께 해 떠오르는 일이 너무 많아 할 말이 분수처럼 샘솟아 오릅니다. 86년 9월 민언협이 보도지침을 폭로한 뒤 안기부가 마포 사무실을 급습해 풍비박살이 났을 때 한걸음에 달려 나와 사무실을 지켜주었던 성유보 이사장님, 민언련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만사를 제치고 헌신했던 성유보 이사장님, 긴긴 세월 몸 바쳐 이루고자했던 언론민주화를 이루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언론권력의 삿된 힘이 기세등등한 오늘입니다. 신독재의 망령이 2014년 대한민국사회를 유령처럼 휘감고 그 어둠을 헤쳐 나갈 길을 우리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장님은 타계했지만 우리는 아직 이사장님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우리 처지가 너무도 가련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만난 곳이 세월호 광화문 단식농성장이었습니다. 그때 말씀하셨지요. 나, 건강 많이 좋아졌다, 다시 열심히 해보자. 당신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정의의 초대장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라, 다시 일어나라, 미몽에 빠지지 말라, 깨치고 나가 완전한 민주화와 통일세상, 언론정상화를 위해 몸 바쳐 일하라!



 성유보 이사장님, 편히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