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2014년 10호)
등록 2014.10.22 16:43
조회 54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김언경 사무처장 l true4731@naver.com  





  지난 7월 민언련은 30주년 기념 추진위원을 모시는 이메일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분이 가입의사와 함께 약정금액을 알려왔다. 그런데 그중 5만원도, 10만원도 아닌 ‘1000’이라는 숫자만 덜렁 써놓은 분이 있었다. 혹시 천만원? 아님 천원?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숫자를 보며 사무처 활동가들은 오타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며칠 뒤 미국에서 전화 한통이 걸려왔고 그는 박철균 회원이었다. 


  그는 나의 신문분과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후배였다. 모니터를 제대로 안 해오고 관전평만 날리셔도 꾹 참아야했던 어르신들(?)과는 달리, 속 시원하게 잔소리 한번 해도 되는 후배. 그가 언제 언협에 왔는지, 언제까지 나와 연락이 되었는지조차 희미했지만, 그로 인해 나의 언협 생활은 재미있고 풍성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어느날 그가 ‘천달러’가 되어서 나타났다. (그가 1000달러를 추진위원비로 보내주면서 사무처에서는 그를 ‘천달러 회원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에 출장가면 들르겠다던 그는 10월 3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민언련 사무실로 달려왔다. 나는 너무 오랜만에 만날 후배를 생각하니 금쪽같은 개천절 공휴일에 사무실을 나가면서도 설렘으로 가득했다.   



  박철균 회원은 93년 5기 언론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고려대에 등록만 해놓은 상태로 군대에 다녀왔단다. 93년 2월 강원도에서 서울에 올라와 지낼 방을 얻고 1학년으로 복학할 준비를 마쳤지만, 선뜻 동아리에 가입하기 머쓱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학교를 다닐까 기대도 되고 조금 싱숭생숭하던 2월쯤이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도 한겨레신문과 말지도 보셨기 때문에 서울에 온 뒤에도 저도 한겨레를 읽었어요. 거기서 언론학교 광고를 본거죠. 그땐 아마 수강료가 5만원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서울에 있는, 말지를 만드는 대단한 단체 사람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끌렸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강원도 ‘시골 사람’에게는 그런 환상이 좀 있거든요. 

게다가 언론학교를 졸업하면 그 대단한 언협에서 활동도 할 수 있다니 당연히 신문분과를 시작했죠.  매주 두 개 신문을 읽고 정리해오는 숙제가 있었죠. 토론하고 술도 매번 열심히 마셔야했죠. 매주 모니터보고서 냈죠.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그때 참 열심히 했어요. 그렇죠? 

도움이요? 당연히 도움 많이 되었죠. 그렇게 신문을 꼼꼼하게 읽고 토론하고 비평 글을 써보는 것 자체를 보통 사람들이 잘 안하잖아요. 신문분과는  저에게 정말 좋은 학교였죠. 그리고 낯선 서울살이와 대학생활에도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그는 그렇게 93년부터 3년간 언협 신문분과 활동을 했다. 그는 신미희, 노영란 전 간사와, 정동익 의장님,  그리고 신문분과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언협에서 모니터 활동하던 것도 좋았지만, ‘참언론 산악회’하면서 함께 산에 올라가고 술 마시고 그랬던 기억도 참 많이 남아있어요. 그때는 어르신들이나 젊은 회원들이나 다 함께 산에 올라가서 맛있는 도시락 먹고 술도 마시며 놀다 내려오고 그랬잖아요. 참언론 산악회 조끼도 맞춰 입고 깃발도 들고 다니면서 참 즐거웠어요. 산에 오르며 선생님들께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고 그랬는데 그게 다 저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었어요. 



나에게는 최근 그가 격하게 기억난 순간이 있었다. 작년 겨울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성동일 아저씨가 시티폰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박철균’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시절, 그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 잘 들려요? 나 지금 학교 공중전화 옆 벤치에 앉아 전화해요. 누나 시티폰 알아요?” 


용건도 없으면서 자랑하러 전화한 그에게 나는 실없이 웃었지만 공부하고 언협 활동하며 여러 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필요해서 ‘신무기’인 시티폰까지 장만한 그가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는 늘 바쁘고 뭔가를 탐색하러 다녔었다. 그런 그가 어쩌다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까.



제가 졸업할 때는 IMF가 터지기 전이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대기업들은 채용을 많이 줄여 취업이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니면서 과외 아르바이트하던 아이들 부모님들께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이었어요. 저는 그분들께 장사를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동대문시장 일자리를 졸랐는데 안해주시더라고요. 대신 동대문시장 근처에서 상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학원을 차리면 전폭적으로 밀어주시겠다는데, 저는 과외하다 학원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던 참에 우연히 미국에서 뷰티샵을 하시는 친구 아버님이 미국에 들어와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죠. 저는 한번 부딪쳐보자 하는 맘으로 비행기 표를 끊어서 친구 아버지께 찾아갔어요. 

그리곤 바로 취업이 되어, 미국생활을 시작했죠. 처음엔 작은 뷰티샵 소매업을 하다가, 도매업을 하게 되고 또 그러다 제 사업을 차릴 수 있게 되었어요. 주로 가발을 수입해서 미국에서 유통시키는 일인데 지금은 꽤 매출이 괜찮아요.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몇 해 더 취업 재수를 하다가 어렵게 대기업에 들어갈 수는 있었을지 모르죠. 삶을 다시 살 수 없으니 어떤 길이 더 좋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지금 삶에 만족해요. 제가 열심히 한 만큼 경제적 보상도 있고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고 좋아요. 



박철균 회원은 미국에서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지금 이라는 가발 유통업을 하면서 미국암환자협회는 물론 한국의 대학병원 두 곳에 암환자를 위한 가발을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뉴욕 한인사회에서 나름 제 몫을 해나가고 있는 박철균 회원에게 민언련 식구들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우선 청년들에게 민언련 모니터 활동을 강추합니다. 분과는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애초 기자가 될 생각도 없었고 지금 언론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지만, 민언련 모니터 활동이 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먼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행간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그 글의 취지를 꿰뚫는 능력은 어떤 일을 하던지 필요한 자질이에요. 그리고 민언련에서 많은 연령층의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활동하면서 사회성도 넓어지고 정말 버릴 게 없습니다.   


두 번째로 민언련에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미국 한인들은 팟캐스트로 한국 소식을 많이 접하거든요. 그래서 민언련도 꼭 팟캐스트 방송을 만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이건 미국이 아니라 국내에서 민언련 논평과 모니터보고서, 언론운동 현황 등을 홍보하는데도 실질적으로 가장 유용한 방법일거라고 생각해요. 민언련 팟캐스트! 정말 빨리, 꼭 만들어주세요.  


세 번째로 혹여 암이나 기타 의료적인 이유로 가발이 필요하신 민언련 회원님께는 제가 무료로 가발을 제공해 드릴테니 꼭 사무처로 연락주세요. 



여독에 지친 그를 위해, 또 업무에 지친 나를 위해 우리는 한잔 술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다시 시간이 나면 만날 수 있기를 기약했는데, 그 사이 성유보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유난히 많이 울며 나흘을 보낸 나는 언협을 만들고 시민단체로 발전시키며 헌신하신 선생님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과 지지 속에서 회원활동을 하며 성장한 청년들이 이제 이렇게 건실한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그분들께 작은 보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