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과 나 - 정동익 회원] 사명감에 불탔던 언협 의장 시절 (2014년 8호)
등록 2014.09.0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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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에 불탔던 언협 의장 시절


정동익 고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2대 의장 l jdi@korea.com



나는 1975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 동아일보사에서 언론자유수호 투쟁을 벌이다 강제해직되고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래 30년을 줄곧 민언련과 함께해 왔다. 1988년 초대 의장으로 계셨던 송건호 선생님이 한겨레신문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신 이후부터 2대 의장을 맡아 1994년 말까지 활동했고 지금도 민언련 고문을 맡고 있는 왕고참 회원이다.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내가 의장을 처음 맡았을 때 언협의 주력부대는 모두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떠나고 <말>지 실무자들만 일부 남아 언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언협은 <말>지 발간 업무가 주로 했고 지금의 시민언론운동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을 때였다. 나는 공개채용 시험을 통해 <말>지 기자들을 보강하고 실행위원회를 다시 꾸렸다. 그리고 대학 언론인 출신들을 간사로 영입했다.


김택수, 신미희, 이진숙, 조진경, 노영란, 이한기, 박광우, 김두환 등이 합류하면서 언협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91년, 시민들에게 언론운동의 중요성을 교육시킬 ‘언론학교’를 개강한 것이다. 제도언론의 왜곡 편파보도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언론학교를 매번 가득 메웠다. 나는 언론학교 교장으로서 수강생들에게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언론의 주인인 독자와 시청자 즉 국민이 나서서 언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녁 강의가 끝나면 꼭 뒤풀이를 하였는데 우리 간사들이 각 분반에 들어가 소주잔을 나누며 언협 회원 가입을 독려하였다.


이듬해 1992년은 총선과 대선이 있었던 해로 어느 때 보다 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우리는 공정한 선거보도를 위해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를 결성하여 선거보도를 본격적으로 모니터 하고 왜곡 편파보도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선 때는 이 일에 60여 명이 석 달 동안이나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매일 그 날의 보도를 라디오까지 모니터 하여 보고서를 작성해 각 언론사에 배포하고 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우리는 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쳤다. 나는 그 때 함께 한 동지들을 잊을 수가 없다. 김언경 사무처장이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였다. 그 당시 임신한 몸이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전국의 대학과 도시들에서 시국강연을 하며 국민언론운동의 중요성과 언론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국민들이 나서서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조중동을 몇 십만 부씩 떨어드릴 수 있을 때 이 나라 민주주의는 살아난다. 지역마다 언론학교를 열고 언론운동 조직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할 때는 왜 불쌍한 전경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느냐. 독재정권 떠받치고 있는 조선일보에 돌을 던지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1993년 3월 5일 언협 제7차 총회에서 나는 언협이 해직언론인 단체에서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언론운동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포했다. 언협 최고 의결기구인 중앙위원 조직을 해직언론인 5명과, 언협, <말>지, 전현직 상근자, 시민 등 6명으로 구성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 때 일부 해직 언론인들은 시민들이 언론을 잘 모르니 시민을 주체로 내세울 수 없다고 반대하기도 했지만 나는 언론운동이 힘을 발휘하려면 해직언론인 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설득하였다.


내가 70 평생을 살면서 이때처럼 열심히 뛰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사명감에 불탔던 언협 의장 시절이 나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