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전재현 회원(2013년08호)
등록 2013.09.1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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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를 보다보면 국회의원들의 뒤에 선 젊은 청년들의 모습이 종종 함께 비친다. 의원들의 오른팔이 되어 정책을함께 연구하고 민원인을 만나고, 실무까지 도맡아하는 그들. 바로 국회의원 보좌진이다. 의원들과 함께 매스컴에 자주 얼굴은 비춰지지만 평소에 만날 일이 없어서 보좌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궁금하던차에 마침 기회가 왔다! 이번 회원 인터뷰에서 만난 회원은 17대와 18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활약했던 전재현회원. 지금은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휴식 중이라는데...전재현 회원을 만나 국회의원 보좌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어봤다. 그리고 더불어 민언련 성장에 주춧돌이 되었던 그리운 이에 대한 추억까지~! 개봉박두!



8월의 어느 날, 전재현 회원과의 인터뷰는 민언련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시작됐다.


“이름은 전재현이구요, 34살 미혼남성이구요, 국회에서7년 반 정도 일을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너무 간단한가요? 하하”


간단한 소개를 부탁하자 정말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어놓는 전재현 회원. 그는 17대부터 18대 국회까지 약 8년 간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한 ‘베테랑’ 보좌진이다. 국회의원 보좌진이라는 직업이 워낙 이직이 잦은 편이라8년 차면 경력이 꽤 긴 편이란다.


국회와의 인연, 그리고 8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던 전재현 회원은 마침 우연찮게 고 김태홍 전 의원실 인턴으로 들어가게 된다. 앗, 그런데 김태홍 전 의원이라면? 바로 민언련의 전신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초대 사무국장이시고, 한겨레신문 발간에 크게 기여하셨던 언론운동계의 대선배님이시다. 그런 김태홍 전 의원의 보좌진으로 있었다니, 전재현 회원과 민언련의 인연이 보통은아닌 듯 하다. 그에게 고 김태홍 전 의원의 이야기를 안들어볼 수 없겠다. 그의 눈에 비친 김태홍 전 의원은 어떤 분이셨을까?

전재현 회원은 고 김태홍 전 의원을 소탈하고 편안하신 분,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감이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기억하고 있었다.


“정의감이 굉장히 강하셨어요. 사람이 자신의 위치나 그런것이 있으면 쉽사리 나서기 쉽지 않잖아요. 한·미 FTA가 체결되던 당시 그 분이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 계셨고, 보건복지위 상임위원장이셨어요. 그 정도 위치에 있으신 분이 여당과 정부 정책에 반대하신다는게 쉽지 않으시죠.

광우병이 이명박 정부에서 크게 문제가 됐는데 저희는 그전부터 광우병 토론회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어요. 광우병의 위험성이라던가 쇠고기 수입의 부당성이라던가. 그런데그게 개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니잖아요? 그런 부분에 개의치 않으셨던 것 같아요. 단지 이건 안좋은 거니까 국민들이 먹으면 안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셨던 거죠.”


당시 여당 소속 정치인의 신분임에도 한·미FTA를 반대하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해 비판하던, 자신의 정치적 입지보다는 국민들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던 김태홍전 의원. 국민들이 원하는 바로 그 정치인의 상을 보여주셨던 그 분은 작년 10월 돌아가셔서 지금은 망월동 묘역에 계신다. 민언련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그 분의 이야기를 전재현 회원을 통해 짧게나마 접할 수 있어 반가웠다.


다시 전재현 회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17대 국회가 끝난 후, 전재현 회원은 민주당 박은수 의원실에서 일을 시작한다. 당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이었던 박은수 의원실에서 전재현 회원이 가장 관심을 갖고 열심히 준비했던 것은 에이즈감염자에 대한 처우 개선과 에이즈를 예방하는 법안이었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에이즈 감염환자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고, 심지어는 에이즈 전염에 대해 어떤 ‘미신’마저 갖고 있던 때였다. 전재현 회원은 관계자들을 만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 열의를 갖고 법안을 준비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쉽게도 그 법은 통과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재현 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안이 통과되지 못해 아쉽다는 말과 함께 향후 국회에 복귀해 다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실에서 일하게 된다면, 다시 관련법안을 준비해서 발의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폭력국회’?! 사실은...

연말이면 신문, 방송 등 매스컴을 거의 도배하다시피하는 장면이 있다. 본회의장 앞을 둘러싸고 여야가 충돌하는 모습.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질 하고 신문지면에는 ‘국회폭력’, ‘폭력국회’라는 제목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가, 그 폭력적인 모습의 근본원인이 무엇이 었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 현장에 서있던 전재현 회원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특히 저같이 체격좋고 남성인 경우는 선봉에 서게 되죠.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실 밀고 막고 이정도 수준이지만 그 과정에서 폭행이 발생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사학법을 통과시키던 때라던가 언론악법을 막아야했던 때 같은 경우는 우리가 해야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행위’였고, 때문에 좋은 모습은 아닐지언정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법안이 잘못되었을 경우의 후폭풍을 감안한다면, 무작정 그 ‘폭력성’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부터 함께 고민해봐야겠다.


민언련, 그리고 전재현 회원 

전재현 회원이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7년 차 회원이다. 국회 일이 바빠 회원활동을 거의 못하면서도 오랜 기간 민언련을 후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처음 전재현 회원에게 그 계기가 되어준 분은 바로 그의 아버님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말 지’가 항상 있었고 한겨레신문도 구독하고 있었죠. 어릴 때 아버지 사업 때문에 부산에 살았는데 그 당시에도 한겨레신문을 보셨어요. 어느 날 제가 학교에서 ‘소년조선’을 가지고 집에 갔는데 그걸 보시고 아버지가 화를 내시는 거에요. 엄청나게...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런걸 봐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건 줄 알고 자랐죠.” 


전재현 회원님의 아버님은 ‘말 지’나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동참하셨단다. 본인의 사업을 하시면서도 공정한 언론, 언론의 자유를 되찾는 일에 늘 관심을 갖고, 함께 하시던 그런 분이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을 보며 자란 전재현 회원에게 공정한 언론을 만드는 활동에 관심을 갖고 후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민언련과 오랫동안 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에 오히려 그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늘 ‘마음의 빚’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일반 기업에 취업을 했으면 경제적으로 훨씬 윤택한 생활을 했을 것이고, 조금 더 편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요. 항상 ‘마음에 빚’을 갖고 있죠. 그래서 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최대한 도움을 드리려고 하고 있어요.” 


시민단체활동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순간 쑥쓰러워졌다. 그가 우리 활동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지만, 오히려 전재현 회원처럼 꾸준하게 민언련을 후원하고 응원해주는 회원들은 우리 활동가들에게 ‘마음의 빛’이 아닐까?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떠올리면 기운나는 등대같은 존재말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에게 민언련과 민언련 회원들에게 보내는 한마디를 부탁했다. 


“민언련이, 물론 다른 시민단체들도 다 그렇겠지만, 최근 몇 년간 굉장히 힘들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지켜주셔서 고맙구요, 저도 언제나 민언련의 회원으로서 . 민언련의 활동을 응원하겠습니다.”


건강이 회복 되는대로 전재현 회원은 곧 국회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의원실로 복귀하게 될 날, 국회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칠 그의 모습,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