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시민 회원으로 넘쳐나는 민언련을 꿈꾸며
등록 2014.11.2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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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회원으로 넘쳐나는 민언련을 꿈꾸며



오수진 활동가 osjlove5@hanmail.net


민언련 3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18일에 열릴 30주년 기념식이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을지 논의가 한창이다. 그 와중에 ‘김시창’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기념식의 사회자로 낙점된 그 이름을 듣고 ‘무명 연예인인가?’ 싶어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해봤다. ‘김시창닷컴’이라는 사이트가 맨 위에 뜨는 걸 보니 유명하긴 한가보다. 그런데 사이트를 클릭하니 뜬금없이 중고차 매매사이트가 나왔다. 잘못 찾았다 싶었는데, 그 분이 맞다. 



민언련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 때 졸업을 못해서 12학기나 다니게 되었어요. 10학기부터는 도저히 집에 손 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말>지 독자사업부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어요. <말>지에 근무하는 직원은 의무적으로 <언론학교>를 들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언론학교 10기를 수강하면서 수련회를 갔었는데, 거기서 장기자랑 시간에 마이크를 잡고 몸을 좀 움직였지요.(웃음) 그 모습을 보고 당시 상근 간사님들이 “당신은 속세에 묻히면 안 될 사람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이후 바로 민언협 회원이 되었고, 노래패(언제나b가끔#)를 만들어 본격적인 회원 활동을 시작했어요. 몇 년 동안 회원 활동에 전념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상근 활동가가 되어 있더군요. 그때부터 5년간 상근 활동가로 지냈습니다. 


촉망받는 회원이이자 상근 활동가로 살던 그가 왜 다른 일을 택했는지 궁금했다


박원순 시장이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시민단체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려면 상근 활동가들이 모두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었죠. 저도 오래 언론운동을 하기위해서는 스스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대학원을 갔어요. 석사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는데, 박사과정까지 하려니 애들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더군요. 나름대로 수입원을 확대하기 위해 강의도 하고, 원고도 쓰고, 만화(만평)도 그리는 등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해봤지만 부수입으로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 때 가까이 있던 사람이 ‘중고차 사업에 투자해라’고 하더군요. 솔깃했어요. 


결국 모을 수 있는 모든 재산을 모아서 거기에 투자하게 되었는데, 첫 달 수익금을 받은 후에 그 사람이 연락이 안되더군요. 자취를 감춘거죠. 참 암담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그 사람이 일했던 수원의 중고차 판매업소를 찾아갔죠. 그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옆에서 딱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밖에 있는 차를 팔아라”고 하더군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대 두 대 팔다보니 조금씩 생활비가 만들어지더라구요. 그때부터 정신없이 일에 매진했지요. 다른 딜러들과는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김시창닷컴’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었지요. 


그렇게 일에 매달리다보니 2007년도에 제 명의로 된 매매상사 사무실도 차리게 되었어요.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에만 꾸준하게 광고를 했고, 지금도 제 고객들은 대부분 <한겨레>신문 주주분들, 독자들이 대부분입니다. 


‘평화의나무 합창단’ 활동을 하는 김시창 회원, 합창단 이야기를 묻자 얼굴엔 활기가 돌았다


고향이 안동인데, 거기서 군 복무를 했어요. 당시에 안동지역 노래패 ‘햇살’에서 열심히 노래패 활동을 했지요. 노래패가 얼마나 좋았는지 복학을 한 뒤에 바로 ‘과 노래패’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고, 민언련에 와서도 바로 노래패를 만들었죠. 노래패를 만든 다음해부터 내리 3년 동안 정기공연을 했었어요. 그때가 참 즐겁고 재밌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민언련을 떠나서 몇 년 동안 사업에만 몰두하다보니 “노래하고 싶다, 시민운동 하고 싶다”는 욕구가 또 생기더군요. 그래서 지난 2009년도에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평화의나무 합창단’에 입단했어요. ‘노래로’ ‘시민운동을 하는’ 합창단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간절하게 내가 원하던 곳이더군요. 그때부터 ‘물 만난 고기처럼’ 활동을 했어요. 부대표 일 년, 대표 일 년 반을 일하다보니 어느새 40여명 규모의 합창단이 거의 100여명의 규모의 합창단이 되어 있더군요. 뿌듯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라 여러 가지 곤란하고 어려운 일들도 생기지만 합창 연습할 때만큼은 제일 행복한 시간 같아요. 


이번에 민언련 30주년 창립기념행사에도 우리 합창단 사람들과 민언련에서 새로 생긴 노래패 ‘막모인 사람들’이 함께 노래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성유보 선생님 추모곡도 부를 겁니다. 


성유보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갔다 


성유보 선생님께서는 제 결혼식 주례를 해주셨어요. 내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사장님이셨으니 정말 아버지 같은 분이셨죠. 아휴, 그 분 생각 떠올리면 울컥해져서 안 되는데……. 우리 합창단도 참 좋아하셨어요. 시간만 되면 공연을 보러오셨죠.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계신 걸로 생각하고 싶어요. 


성 이사장님은 우리나라 언론운동을 상징하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민언련에서 일했을 당시에 현직 언론인들은 제게 민언련을 언론운동의 맏형이자 모체로 생각한다고 이야기 했답니다. 민언련은 <말>지와 <한겨레>신문을 만들었고, 언론인 중심의 언론운동을 시민언론운동으로 변화 발전시켰지요. 민언련 자체가 가지고 있던 힘도 있었지만, 저는 성유보 선생님의 품성과 인덕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을 대할 때 나이와 직위를 떠나서 친구처럼, 동지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셨지요. 싸워야 할 대상들 앞에서는 냉철하고 엄격하셨지만 활동가들이나 회원들을 대하실 때는 더없이 따뜻한 분이셨죠. 


1995년 7월 8일 언론학교 총동우회 일일호프


그는 선배 활동가로서 후배 활동가들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활동가는 시민단체의 핵심 자산입니다. 옛날 인디언들은 집안 어른 한 분이 돌아가시면 ‘큰 도서관이 하나 사라졌다’고 했다지요. 경험과 정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특히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가진 경험과 정보, 인맥은 그 단체의 뿌리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래요. 참 소중한 자산이지요. 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전업을 하거나 단체를 떠나게 되면 단체는 그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자산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민단체에 숙련된 장기 근무 활동가가 많지 않다는 것이 그래서 더 안타깝게 느껴지죠. 민언련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저를 포함해서 여러 활동가들이 일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많은 수가 떠났습니다. 


상근 활동가들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배려하는 안정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활동가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시민단체 운영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고민이나 논의가 너무 뒤로 밀려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앞으로라도 이 부분에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침 30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심도 있게 진행 되었으면 합니다. 


회원모임에 열성적이었던 김시창 회원은 회원모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자발적으로 회원가입을 해서 활동하는 시민 회원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학교>나 토론회 등 민언련이 개최하는 각종 행사들을 진행할 때 새로운 회원 영입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언론학교>를 들으면서 회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듯이 언론개혁에 관심을 보이는 다양한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무언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잘 제시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을 함께 합시다’ 라든가 ‘이런 역할을 할 시민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알리다보면 좀 더 많은 시민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회원모임을 좀 더 다양하게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의 관심분야는 참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잖아요. 그런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가 스며들 수 있는 모임들이 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시민단체는 결국 시민회원들이 얼마나 많이 참여하고 있느냐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김시창 회원이 전 상근활동가로서, 회원으로서, 민언련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면 

세월이 참 많이 흐른 것 같은데 언론은 점점 더 자기 역할 못하고 있고, 점점 더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고 있네요. 참 어이없어요. 과거 민언협은 대안언론운동을 제시했고, <말>지와 <한겨레> 창간을 주도했지요. 그것이 구체적인 운동의 성과였다고 생각해요. 민언련은 <언론학교>를 통해 시민언론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고, 우리나라 신문방송모니터운동의 모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니터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왔지요. 조중동 반대와 비판을 통한 언론개혁운동도 앞장서서 해왔구요. 30년 동안 우리 사회에 소금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나갈 것이냐를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언론환경이 너무나 많이 변했지요. 특히 신문방송모니터운동은 보다 폭넓고 대중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시민세력이 있다는 걸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려야 하니까요. 시민회원들이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회원참여 프로그램도 좀 더 많이 열었으면 좋겠고, 다른 시민단체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연대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면 해요. 민언련은 우리나라 시민언론운동의 맏형 같은 존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