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손녀 손자들의 나라를 위해
등록 2015.06.0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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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손자들의 나라를 위해


지난해 12월 첫 손녀를 얻었습니다. 손자보다 손녀 보기가 소원이었는데 먼저 결혼한 둘째 아들 내외가 그 소원을 풀어주었습니다. 직접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보내주는 동영상을 통해 나날이 쑥쑥 자라는 모습이며 늘어나는 이쁜짓들을 보며 경탄하곤 합니다. 딸 바보라더니 손녀 바보도 있나 봅니다.


노파심인지 기우인지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엉뚱한 걱정을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요즘은 세 살짜리 유아들에게까지 영어를 가르친다는데 손녀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나?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별의별 과외를 시키며 아이들을 혹사한다는데 그걸 묵인해야 하나? 못시키게 참견해야 하나?  


걱정은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세월호 참사 같은 안전사고는 제발 겪지 말아야 할 텐데…이 대목을 상상만 해도 할애비인 나는 공연히 목이 메입니다. 하물며, 16년 세월 온갖 어여쁘고 귀여운 짓을 기억속에 아로새기며 애지중지 키운 아들딸들을 밝은 대낮에 두눈 멀쩡히 뜬채 잃은 세월호 참사 부모들이 겪고 있을 참혹한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습니다.


상상은 더 사위스런 사태로 비약합니다. 만약 후쿠시마 핵발전소처럼 우리나라 핵발전소가 무리하게 운행되다 만에 하나 폭발해서 저 귀여운 손녀가 피폭이라도 된다면? 직접 피폭되지 않더라도 국토의 절반이 방사능에 오염돼 영구히 못쓰게 된다면? 그리하여 나라가 재기할 수 없을만큼 타격을 받는다면 어찌될까? 또 동북아에서 미일과 중러 등 강대국들이 자칫 무력충돌로 치닫고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남과 북이 모두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린다면 나라가 온전히 유지될까?  저 귀여운 손녀가 망국의 백성이 되어 강대국의 지배 아래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이제까지 거의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던 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기자로서 지식인으로서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사태를 보려했고 그런 사고방식이 나에겐 친숙했습니다. 한데 손녀를 얻고 나서 부터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태를 앞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갈 그애의 미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손녀의 행복을 바라고 보호하고픈 평범한 할애비의 간절한 마음이 그런 기우와 노파심으로 표출되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 집권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작태들을 보느라면 그런 끔찍한 사태가 반드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기는커녕 엉터리 시행령으로 특위진상조사를 무력화시키려 갖은 몽니를 부리고 있습니다. 인구절벽을 예고하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날로 심각해져가는데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생각은 않고 학교급식비와 보육예산을 매몰차게 삭감하거나 폐지하려 합니다. 이런 나라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예비엄마들의 외침은 결코 가볍게 여길 저항이 아닙니다.  정부가 앞장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정신문화의 기반인 인문사회과학과 기초과학을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청년실업이 위험수위에 이르러 나라의 장래가 지극히 암울한데도 정부는 노동자 해고를 더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더많이 양산하는 법을 만들려고 온갖 꼼수와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수명이 다한 노후 핵발전소를 폐쇄하기는 커녕 안전기준을 속이면서까지 재가동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어렵사리 진전시킨 남북관계를 크게 후퇴시켜놓고, 군사주권은 미국에 무한정 맡겨놓은채  미일과 중국간 대결구도 속에 아무 대책없이 떠밀리다시피 빨려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한 일본이 유사시 미국 지원을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입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란 전문가들의 관측이 나오는 실정입니다.


나라의 명운이 안팎으로 이토록 급박하고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야당은 무기력하고 국민들의 위기의식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언론들이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보수 수구언론은 그렇다 치고 언필칭 진보 독립언론들도 이 문제들을 치열하고 심층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진보 독립언론들은 특히 미일과 중국의 대립을 단순히 동북아 패권다툼으로 축소하지 말고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세계사적인 헤게모니 다툼이라는 관점에서 각국의 구체적인 속셈과 전략의 허실을 총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놓고 공론을 크게 일으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야 나와 같은 할애비 세대가 구한말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우리 할아버지들처럼 무능하고 타락한 지배층이 우리 손녀 손자들이 살아갈 나라를 아예 망치는 꼴을 두눈 뻔히 뜨고도 막지 못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경각심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박우정 이사 (리영희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