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언론'은 비겁했으나 '언론인'들은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원섭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1980년 조선일보서 해직, 전 한겨레신문 창간대변인, 전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전 가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우리 언론이 본분을 잃고 권력에 빌붙어 보인 행태들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45년 전 신문을 들춰보거나 방송을 보면 낯 뜨거운 내용이 한둘이 아니다. 너무도 비굴하고 치욕적인 보도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보도만 보더라도 처음에는 광주학살에 대해 아무 일도 없는 양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신군부세력이 허락하자 보도는 하되 광주시민을 ‘폭도’로 모는 계엄사령부 발표만 일방적으로 실었다. 그 뒤로도 광주 상황을 폭력과 난동으로 얼룩진 양 비틀고 왜곡하는 보도들을 쏟아냈다.
‘권언유착’ 언론 뒤에 가려진 언론인의 양심
광주가 유혈 진압된 뒤 언론은 전두환을 ‘새 시대의 영도자’로 띄우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앞장섰다. 박정희 사망 뒤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 육군소장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새 시대를 이끌 지도자’로 떠오른 데는 언론의 협조가 절대적 역할을 했다. 과연 그 때 언론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모두가 신군부세력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했는가? 전두환 쿠데타를 막기 위한 진실보도에 모두들 눈 감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당시 양심적인 언론인들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두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자들이 옥살이를 했으며, 전국적으로 1천명에 이르는 언론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실을 바로 알려야할 당사자들 노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권력을 잡은 신군부세력과 이에 아첨하며 자신의 잇속을 차린 언론사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해직언론인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고 폄훼하거나 왜곡하며 탄압한 결과이기도 하다. 권언유착 합작품인 셈이다.
▲ 전두환 신군부가 보도 불가로 판정한 광주항쟁 당시 현장 사진들 ⓒ한국기자협회보
진실보도를 향한 치열했던 제작거부투쟁
1980년 당시 상황과 언론인들의 저항을 톺아보자. 12.12 군사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선 언론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언론장악을 위해 이른바 ‘K-공작계획’을 수립해 진행했다. 여기서 말하는 K는 요즘 말하는 K-이니셔티브, K-드라마, K-팝, K-푸드와 같은 한류의 Korea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King(왕) 만들기’ 공작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들은 보안사 안에 ‘언론조종반(언론대책반)’을 만들어 언론을 사전검열하면서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해 ‘보도지침’을 강요했다. 예를 들어 유력 정치인이던 김대중-김영삼씨가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은 보도 불가, 두 김 씨가 외면하고 앉아있는 장면은 크게 키우도록 유도했다.
학생시위가 정점에 달한 5월 15일 보도지침을 보면 학생들 구호 중 “김일성은 오판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 등은 모두 보도 불가였다. 학생시위를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몰아가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진실보도를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권력에 우호적인 언론계 사주나 간부들은 적극 회유하는 한편 저항하는 기자들은 철저히 탄압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신문사 발행인들을 모아놓고 노골적으로 ‘협조’를 당부하는가 하면 군 실세들이 각사 논설위원이나 정치·사회부장 등과 긴밀히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적인 일선 기자들은 ‘진실보도’를 외치며 전두환세력의 권력장악 저지에 나섰다.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계엄사의 검열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고, 여의치 못할 경우 5월 20일 0시부터 제작을 거부한다고 의결한 뒤 전국적으로 검열·제작거부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언론사별로 자체 논의를 거쳐 제작을 거부하는 운동에 나섰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합동통신 등이 특히 치열했고 해직자도 많았다.
내가 근무하던 조선일보의 경우 앞길이 험난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 터라 제작거부투쟁을 이끌어 가야할 선배기자들이 한 결 같이 몸을 사리는 통에 입사 6년차 기자에 불과한 내가 나서 편집국 총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면서 제작거부선언을 주도해야 했다. 저항에 앞장설만한 선배들은 이미 1975년 자유언론실천선언 때 무더기로 해직된 상태였다. 그러나 기자들의 제작거부로 인해 실제 신문발행이 중단되거나 방송이 중지되지는 않았다. 일선기자들은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지만 언론사 부차장 등 간부들이 나서 통신을 베끼고 다른 신문을 베껴가며 지면을 억지로 채웠고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국민들로선 언론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5.18 당시 유력 중앙일간지들은 광주주재 기자 외에 특별취재반으로 기자들을 파견했고 이들이 현지의 참혹한 실상을 기사로 보내왔지만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계엄사 검열 탓이 컸지만 권력의 눈치를 보며 감히 게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시 광주학살 현장을 눈으로 보면서도 보도할 수 없는데 좌절하고 분노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다음과 같은 공동사직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 5. 20.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왼쪽부터 빨간펜 검열본, 검열 후 전남매일신문 인쇄본
권력에 정면도전한 언론인들, 해직기자 1천명 넘었다
전두환 세력은 위기를 넘기고 권력기반이 어느 정도 다져지자 검열·제작거부에 앞장 선 기자들에 대한 보복조치에 나섰다. 보안사령부는 사찰을 통해 해직대상자를 선정하고 명단을 작성해 각 언론사에 통보했다. 더 놀라운 것은 각 사가 평소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까지 끼워 넣어 900명이 넘는 인원들을 해직시켰다는 것이다. 자료에는 그리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1천명이 훨씬 넘는 기자들이 해직됐다. 또 당시 기자협회장과 부회장단, 경향신문 문화방송 동아일보 기자 등 상당수 언론인들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5.18 광주항쟁 당시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광주 이외 지역에서도 유인물을 만들어 유포하는 등 투쟁에 나섰지만 집단적·조직적으로 신군부에 저항한 직업군(職業群)은 사실상 언론계가 유일하다. 신군부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일선기자들이 강제 해직당하는 와중에 언론계에서는 이미 판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광주항쟁을 폄하하고 민주화세력을 공격하는데 앞장선 언론들이 많았다. 재빨리 권력에 줄을 서 ‘전두환 띄우기’에 앞장서는가 하면 개인적 영달을 위해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며 비굴하고 낯 뜨거운 기사를 써 환심을 사려 한 기자들도 많았다.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과 이진희 문화방송 사장은 신군부가 해산된 국회를 대신하도록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언론통폐합 조치도 이어서 강행됐다. 전두환 정권은 11월 건전언론을 육성하겠다며 전국 64개 언론사 중 신문 14개사, 방송 27개사를 통폐합 조치했다. 7개 통신사를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1개사로 통합했다. 지방신문들은 ‘1도 1사’ 원칙에 따라 하나로 통폐합했다. TBC동양방송, 동아방송 등이 KBS(한국방송공사)로 합병됐다. 보안사는 소유권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언론사 사주들을 겁박해 이의가 없다는 포기각서를 강제로 받았다. 통폐합 사태로 또 한 차례 대량해직이 발생해 300여명이 해고됐다.
▲ 1984년 12월 19일 서울 장충동 피정의집에서 열린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총회
끝나지 않은 투쟁! 80년 해직언론인 45년의 외침
80년 언론투쟁을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본류’에 해당하는 것은 전두환 신군부에 분연히 맞서 싸운 검열·제작거부 투쟁이다. 언론통폐합도 권력이 자의적으로 언론지형을 바꾼 것이고 강압적으로 포기각서를 받았다는 점에서 피해를 입은 것이지만 ‘지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언론통폐합이 크게 부각되면서 수많은 기자들이 해직된 검열·제작거부 투쟁은 축소되거나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심지어 80년 언론투쟁이 언론통폐합에 반대해 저항한 투쟁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은 45년 동안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당당한 명예회복, 실질적인 배·보상’을 요구해 왔으나 아직도 해결될 기미가 없다. 해직기자들은 1984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결성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선배들과 힘을 합쳐 언론자유 투쟁을 끈질기게 이어왔다. 위 3개 언론단체가 주축이 된 단체 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은 <말>지를 창간해 ‘보도지침’을 폭로하기도 했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의 주춧돌이 되기도 했다. 민언련(민주언론운동연합)은 바로 언협이 확대하며 발전한 단체다.
🔻날자꾸나 민언련 2025년 여름호(통권 231호) PDF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