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손자’ 무릎 꿇은 광주, 올해도 갑니다 | 신미희 사무처장
등록 2023.05.0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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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숲이 가장 싱그러운 시기, 5월이다. 새로 나온 여린 잎새들의 연둣빛, 신록(新綠)의 항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연의 초록빛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은 거저 오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생명의 새잎을 낸 나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우린 봄의 찬란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해마다 5월이면 광주로 간다. 1993년 시작된 ‘민언련 광주순례’는 코로나19로 2020~2021년 두 해를 건너뛴 것 말고는 계속됐다. 올해로 31번째를 맞는다. 지난 3월엔 ‘광주학살’ 주범인 전두환 씨 손자 전우원 씨가 광주를 찾아 무릎을 꿇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죄를 사죄했다.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진정어린 사죄라면 그가 누구든 환영할 일이다.

 

광주는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스무 살 처음 마주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 앞에 난 꼼짝 못하고 며칠을 앓아 누웠다.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생각이, 삶이 달라졌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민언련 전신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에 들어온 게 1991년. 가장 푸르른 20대 청춘을 온전히 보낸 곳이다.

 

1993년 광주순례는 민언협 신록 같은 ‘젊은 간사들’의 숙명적 선택이었다. 1980년 신군부 폭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연히 일어선 ‘5월 광주정신’은 1984년 언론민주화를 향한 염원으로 민언협을 창립한 정신과 맞닿아 있으므로. 그땐 국립묘지도 아니었다. 흙먼지 날리는 좁은 비포장 길을 올라야 무덤에 닿았다. 선배열사들의 뜻을 잇겠다는 뜨거운 다짐 속에 돌아오곤 했다.  

 

광주와 민언련, 그 숙명의 역사

 

그 광주에 민언협 창립을 주도한 초대 의장이자 한겨레 초대 사장를 지낸 한국 언론의 사표 청암 송건호 선생이 잠들어 있다. 민언련 창립과 한겨레 창간 주역으로서 행동하는 지식인, 사상의 은사로 불린 리영희 선생도 유언대로 5.18국립묘지에 영면해 있다. 민언련 초대 사무국장으로 19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을 기획한 김태홍 선생 역시 두 분과 함께 잠들어 있다. 세 분 모두 언론인 출신의 민주화운동가이면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자 및 5.18민주화운동 조종자로 투옥돼 갖은 고초를 치렀다.  

 

이번 5월, 민언련은 또 한 분의 언론운동가를 떠나보냈다.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등을 역임한 이범수 동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는 개혁적 연구자가 소수인 언론학계에서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통해 언론과 사회의 민주화에 실천적으로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민언련 언론학교 강의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길도 마다하지 않던 분이다.

 

이범수 전 이사장이 지난해 연말 사무처로 토종 우리밀로 만든 밀가루와 국수를 선물로 보내주셨다. “토종 우리 밀이 혹한을 이겨내고 자라듯, 우리 모두 현재의 혹한을 극복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라며... 12월 강추위를 날려버릴 만큼 따뜻한 격려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찾아온 암을 이겨내진 못했다. 올해 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 구호가 “오월의 정신을, 오늘의 정의로”이다. 민언련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겨본다. 고 이범수 전 이사장님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신미희 민언련 사무처장

 

※ 광주순례 신청하기 https://url.kr/tgzch1 (5월 12일까지 신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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